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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필사 & 시낭독/2021 시필사 : 1일 1시285

아침 - 유희경 [2021 시필사. 159일 차] 아침 - 유희경 어둠이 마음을 거두고 사방에서 빛이 번지기 시작할 때, 아무 말도 하지말아요. 뒤척여 스스로 자리를 마련하려는 소리들에 대해, 간밤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 그러나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꿈과 함께 가라앉아버린 감정들에 대해, 그러나 기어코 오늘도 사랑해야 하는 당신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말아요. 이 무렵, 당신의 반대편 어느 하늘에는 달이 밝아오고, 사람들이 혼곤한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는 우연한 필연에 대해, 그 비밀 많음에 대해, 그런 것으로 가득한 생에 대해, 아직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의 없음과, 곧 일어난 어떤 일들의 아직 없음에 대해 그 가능의 불가피함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침 #유희경 #.. 2021. 6. 8.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2021 시필사. 158일 차]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 2021. 6. 7.
1막 1장 - 김이듬 [2021 시필사. 157일 차] 1막 1장 - 김이듬 뇌우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 시골 단층 사진관 안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다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숙련된다면 기술이지 아름다운 건 더럽게 어려울 거야 쉽게 느는 게 아니라고 기술과 예술의 차이를 말하는 두 사람을 나는 못 본 척한다 비가 그치기 전에 현상됩니다 아래에서 사람이 등장한다 무대 뒤에도 사람이 있다 극은 짧고 일반적으로 사랑을 다룬다 #1막1장 #김이듬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6.
달빛체질 - 이수익 [2021 시필사. 156일 차] 달빛체질 - 이수익 내 조상은 뜨겁고 부신 태양 체질이 아니었다. 내 조상은 뒤란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달의 숭배자였다. 그는 달빛 그림자를 밟고 뛰어놀았으며 밝은 달빛 머리에 받아 글을 읽고 자라서는, 먼 장터에서 달빛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낮은 이 포근한 그리움 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 힘겨운 과정일 뿐이다. 일생이 달의 자장 속에 갇히기를 원했던 내 조상의 달빛 체질은 지금 내 몸 안에 피가 되어 돌고 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괜히 가슴이 멍해져서 끝없이 야행의 길을 더듬고 싶은 나는 아, 그것은 모체의 태반처럼 멀리서도 나를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이 바닷물을 끌듯이. #달빛체질 #이수익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 2021. 6. 6.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2021 시필사. 155일 차]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이제니 그래 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 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 2021. 6. 6.
손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21 시필사. 154일 차] 손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리의 손가락 다섯 개, 그 각각의 끝에 있는 스물일곱 개의 뼈, 서른다섯 개의 근육,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 #손 #비스와바쉼보르스카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3.
풀 - 김수영 [2021 시필사. 153일 차]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김수영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2.
문병 ―남한강 - 박준 [2021 시필사. 152일 차] 문병 ―남한강 - 박준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문병 #남한강 #박준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2.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2021 시필사. 151일 차]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만나고가는바람같이 #서정주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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