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필사 & 시낭독/2021 시필사 : 1일 1시285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 안희연 [2021 시필사. 285일 차]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 안희연 매일 아침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빛기둥 아래 놓인 색색의 유리구슬 갓 낳은 달걀처럼 따뜻한 그것을 한가득 담아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유리구슬을 넣어 빵을 굽는다 빵 하나에 구슬 하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향긋하지 않은 것은 없다 실수로 구슬 하나를 떨어뜨린 날 할아버지께 호되게 혼이 났다 아가야, 저 침묵을 보거라 한 사람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흩어진 유리 조각 틈에서 물고기 한마리가 배를 뒤집고 죽어 있었다 손그릇을 만들어 물고기를 담으니 기린처럼 목이 길어졌다 할아버지,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이에요? 파닥거릴 수 없다는 것은 빛나는 꼬리를 보았다 두 눈엔 심해가 고여 있었다 층층이 빵을 실은 트.. 2021. 10. 12. 바다 일기 - 이해인 [2021 시필사. 284일 차] 바다 일기 - 이해인 1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2 바람 많이 부는 날 나는 바다에 나가 마음에 가득 찼던 미움과 욕심의 찌꺼기들을 모조리 쏟아 버리고 거센 파도 밀리면 깊이 숨겨 두었던 비밀 이야기들을 바다는 소라 껍질에 담아 모조리 쏟아 버리네 3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바다를 생각하다가 꿈에도 바다에 가네 아이들과 함께 조가비를 줍다가 금방 하루가 저물어 안타까운 바다빛 꿈을 꾸네 #바다일기 #이해인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 2021. 10. 12. 눈물이 온다 - 이병률 [2021 시필사. 283일 차] 눈물이 온다 - 이병률 왜 눈이 온다, 라고 하는가 비가 온다, 라고 하는가 추운 날 전철에 올라탄 할아버지 품에는 작은 고양이가 안겨 있다 고양이는 이때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 어깨 위로 올라타고 사람들 구경한다 고양이는 배가 고픈지 울기 시작하는데 울음소리가 컸다 할아버지는 창피한 것 같았다 그때 한 낯선 청년이 주머니에서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내 작은 고양이에게 먹였다 사람들 모두는 오독오독 뭔가를 잘 먹는 고양이에게 눈길을 가져갔지만 나는 보았다 그 해쓱한 소년이 조용히 사무치다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안으로 녹이는 것을 어느 민족은 가족을 애도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출할 때 옷깃을 찢어 표시하고 어느 부족은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성기의 끄트머.. 2021. 10. 10. 님의 침묵 - 한용운 [2021 시필사. 282일 차]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2021. 10. 9. 사막 - 이성복 [2021 시필사. 281일 차] 사막 - 이성복 세상은 온통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자꾸 슬퍼졌습니다 당신은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아니면 어찌 세상이 슬퍼졌겠습니까 큰길로 나아가 소리 높여 통곡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의 어깨가 털 뽑힌 새처럼 파닥거렸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아들아, 사막으로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막 달아났습니다 달아날수록 사막은 가까웠습니다 다가갈수록 사막은 당신을 닮아갔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내가 어찌 사막을 보았겠습니까 #사막 #이성복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10. 9. 울음 - 이성복 [2021 시필사. 280일 차] 울음 - 이성복 때로는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는지 잊었습니다 내 팔은 울고 싶어합니다 내 어깨는 울고 싶어합니다 하루 종일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 하나 덜컥거립니다 한사코 그 슬픔을 밀어내려 애쓰지만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 슬픔이 당신 자신이라면 나는 또 무엇을 밀어내야 할까요 내게서 당신이 떠나가는 날, 나는 처음 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울음 #이성복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10. 7. 기다림 - 이성복 [2021 시필사. 279일 차] 기다림 -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기다림 #이성복 #시필사 #만년필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10. 6. 가수는 입을 다무네 - 기형도 [2021 시필사. 278일 차] 가수는 입을 다무네 - 기형도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로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려만 그.. 2021. 10. 6. 꽃나무 - 이상 [2021 시필사. 277일 차] 꽃나무 - 이상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 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런 흉내를 내었소. #꽃나무 #이상 #시필사 #닙펜 #딥펜 #펜글씨 #손글씨 #매일시쓰기 #1일1시 #하루에시한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2021. 10. 5. 이전 1 2 3 4 ··· 3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