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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공부/독서 기록

할매 - 황석영

by 박지은(MyMars) 2026. 2. 23.

2026. 1. 10. 문예북흥 53회 황석영 소설가 편

대가는 역시 다르다.

문예북흥 가 본 중 사람도 제일 많았고, 말씀도 제일 좋았다.

황석영 선생님, 정정하시고 꼿꼿하시고 여전히 날 선 영혼! 너무 멋져 ㅜㅜ

 

노년의 예술가에 대해 하신 말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야지,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

삶을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이란...

 

AI에 대한 말씀도 구구절절 얼마나 시원했던지,

요즘 멍청이들이 너무 많은데 다들 제발 (선생님 말씀처럼) 책을 읽자!

 

"예술가는 평생 전위(아방가르드)에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만이 영원하다"
"자신의 상상력을 믿어라, 누구나 꿈을 꾼다"

 


<할매 - 황석영 장편소설> 중에서

 

[16페이지]

개똥지빠귀 흰 점박이와 개암이 날개 부부 한 쌍은 둥지 안에서 서로 날개를 맞대고 심장이 뛰는 느낌을 함께하고 있었다. 흰 점박이는 며칠 전부터 이동을 시작한 다른 부류 철새들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에 예민해졌다. 그는 부리를 쳐들고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묻어오는 고니, 황새, 두루미 같은 큰 새들이 서로 나직하게 주고받는 소리를 가만히 듣곤 했다.

 

[58~59페이지]

다들 물러가고 몽각이만 들여라.

몽각이 짚신 벗고 마루에 올라 세 번 절하고 단정히 앉았더니, 큰스님은 누운 채로 천장을 향하여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그가 노스님의 머리맡으로 옮겨가 앉으니, 해골처럼 피부가 바짝 말라붙은 몰골의 광덕 스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이제 절집을 떠난다마는, 너는 언제까지 이 집에 머물 것이냐?

몽각은 그의 모습과 떠난다는 말씀에 금방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님께서 나가라고 하지 않으시면 앞으로도 쭉 머물겠습니다.

너 외에는 아무도 너를 나가라고 할 자는 없다.

하고 미약하나마 스님은 웃음소리를 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지. 내가 왜 너를 부른지 알겠느냐?

몽각이 무릎 위로 코를 박고 절하며 말했다.

스님 좋아하시는 노각이 올해도 잘 익었습니다. 곧 따다가 드릴 터이니 잡숴보십시오.

큰스님은 말했다.

너는 마침내 견성을 할 것이다. 천지의 이치로 보아도 너를 살려낸 뜻이 그러할 것이니라.

 

[65~66페이지]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아름답고 젊었으며 신분도 귀하였습니다. 콩 한알이라도 나눠 먹으며 부부의 인연을 맺어온 지 어언 삼십년입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늙고 병은 깊어가는데 굶주림과 추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곁방살이나 한모금의 마실 것도 사람들이 용납하여주지 않으니, 수많은 집집마다 문 앞에서 당하는 수모는 산더미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도 돌보지도 못하는데 언제 부부의 즐거움이 있겠나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밝은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지고, 난초처럼 향기롭던 언약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가지처럼 지나갔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예전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뿌리였습니다. 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것입니다. 좋다고 취하고 나쁘다고 버림은 사람 마음에 차마 할 짓이 못 되지만,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운이 따르는 것이겠지요. 바라옵건대 이제 헤어집시다.

몽각은 어쩐지 슬프기보다는 홀가분하여 기뻐하면서 각자 딸아이 하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말했다

저는 동쪽 고향으로 같 테니 당신은 서쪽으로 가세요.

두 사람이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몽각이 꿈에서 깨어났다

 

[81~82페이지]

한 사나흘 죽도록 앓고 나서 어느 날 새벽에 그는 잠에서 문득 깨어났다. 몽각은 두 눈을 떴을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는데 보통 때처럼 말을 걸던 저쪽 상대 몽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말을 걸려던 이쪽 몽각마저 사라졌다. 몸은 여기 있는데 몸의 주인이라던 나는 어디로 갔나. 나는 없어져버렸다. 그는 앓다 일어나서 허청허청 나무 쪽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겨울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잎을 떨구고 구불구불한 가지를 사방으로 뻗치고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내고 서 있는 팽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걸어가서 나무 둥치에 등을 대고 가만히 앉아보았다. 나는 없다. 나무도 풀도 물도 바람도 돌도 모두 나와 같다. 지금 여기에 모두 다 그냥 있다. 서로가 무심하고 편안하다.

몽각은 섬에 들어온 지 십년이 지나서야 수도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끝없는 갯벌을 향하여 아주 멀리까지 걸어 나갔다. 아무런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온몸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무엇인가 많은 것이 빠져나가버렸다. 지나치게 먹은 음식물의 찌꺼기가 오물이 되어 뱃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수많은 생각의 무게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몽각은 강의 하구에 있던 독살을 허물고 갯가의 사방에 흩어버렸다. 그러나 돌들이 원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다시 팽나무 아래 앉아서 결과부좌하고 참선에 잠겼다. 하늘에서 구름이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가 흩어지며 흘러갔다. 모든 것이 그러하리라.

 

[83페이지]

그는 한때 그가 부지런히 잡아서 먹고 몸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들에게 자신을 보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비틀거리며 갯벌로 나온 길이었다. 섬의 서쪽 능선을 넘어가면 곧 수라 갯벌이었다. 그는 갯벌과 아득하게 멀리 밀려나간 바닷물의 중간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그의 머리털을 날리고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았다. 해가 차츰 수평선 쪽으로 떨어져 저녁노을이 온 하늘에 붉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몽각은 그의 이름처럼 꿈에서 깨어나서 꿈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잠들었고 달이 떴다. 깊은 밤이 되어 바닷물이 조용히 밀려 들어왔고 그의 몸은 물에 잠겼다.

 

[148페이지]

경순은 그때 열다섯살이었는데 풍물 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길놀이를 하고는 장터 가운데 있는 너른 마당에 판을 잡자, 대보름 굿이라고 가운데 장작을 높다랗게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꽃이 일어나며 주위가 훤하게 밝아지고 하늘에는 보통날보다 훨씬 둥글고 큰 달이 떠올랐다. 이날 처음으로 본격적인 풍물패의 판굿을 본 경순은 그의 핏속에 흐르는 신명을 온몸으로 느꼈다.

 

[220~221페이지]

이 나무가 통과한 육백년이라는 시간은 물론 사람이 정한 시간일 뿐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구분되지 않는 흐름 가운데 있다. 나는 사람으로서 이 육백년을 나무와 더불어 생각해보기로 했다. 불교의 시간 개념 가운데 윤회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윤회란 고대 브라만교 이래로 내려온 생각일 뿐, 석가모니는 윤회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관계의 영원한 순환에 대하여 말하고 카르마의 이어짐에 대하여 말했다. 브라만교나 후대의 세속 불교가 전도와 사원의 유지를 위하여 윤회를 말하고 있을 뿐, 석가모니는 죽음 이후나 그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도 침묵했다. 가령 내가 죽어 수백의 화학물질이 분해되어 어느 소나무 뿌리를 타고 올라 나뭇가지 끝의 일부분이 되어 다시 수백년 마을 풍경을 내다본다든가 하는 상상은 브라만의 영원한 자아 ‘아트만’과 상관없으니, 석가모니 식으로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이 나무를 둘러싼 육백년은 역사가 아니라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며 카르마의 계속되는 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년 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부처의 ‘열반경’과 해월 최시형의 ‘사인여천’에 깃든 설법을 읽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던 생각이 군산에 와서 ‘팽나무’를 만나면서 이제야 성사되었다.

생사는 물론 세상만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벽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큰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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