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소설이나 시집이지!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라 에세이나 그 외 장르는, 보긴 보는데... 예술 순혈주의를 버려야 하는데...아무튼.
처음 이 책을 주문한 건 '문예북흥'에 문형배 재판관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감사한 마음에서였다.
내란으로 얼룩진 그 험한 겨울을 지나 이렇게 대한민국이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시발점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말일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들었기에 저 문장만 보아도 그 또렷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를 때리고 눈을 뜨겁게 만든다.
큰 기대 없이(죄송합니다) 읽기 시작한 이 책에는 북마크 플래그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책에는 플래그가 딱 두 개뿐이었다.
'호의에 대하여'는 저 주문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정말 좋은 책이었다. 침대 맡에 두고 몇 달을 곱씹어 보았다. 앞으로도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시시비비를 가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판사'라는 직업. 딱 떨어지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예술의 영역에 있는 나와는 사고의 흐름이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다독하신다는 말씀이 더욱 인상 깊었다.
그로 인해 얻어진 통찰, 특유의 겸손함과 강직함까지 정말 존경스러웠다.
이제 카이스트 교수로 인생 2막을 여시는 문형배님을 뜨겁게 응원한다.
이런 진짜 어른이 세상에 많아져야 한다.
나도 꼭 저런 어른이 되겠다.


p.15
병원 생활 6개월 동안 "생활 영역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병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많은 반성을 하였다(칼 사이먼트 등, 《마음의 의학과 암의 심리치료》).
p.28
한 부장님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겁니다. 역사 속 인물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p.47
판사의 일 / 2007. 2. 14.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
p.49
식물에 '리비히 법칙'(최소율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식물의 생산량은 식물에 최소량 존재하는 무기 성분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법칙이다. 정치·사회·문화 분야도 마찬가지다. 평균적인 게 우리 사회의 성장 발전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낮은 부분이 우리나라의 성장 발전을 결정한다.
p.60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더디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빠르고 슬픈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길고 기쁜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p.93~94
"내가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라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여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p.95
같이 간 아이들 중에는 어릴 적 청력을 잃었다가 원장님의 노력으로 3년 전에 인공와우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언어 치료를 하는 이가 있었다. 아직 말이 아주 서툴렀다. 어릴 때 말을 들을 수 없어서 지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였다. 아! 대화란 듣는 게 먼저이고 말하는 게 뒤구나. 나는 말을 먼저 하고 남의 말은 나중에 듣는데….
p.106
세월은 흘러 이제 마흔여섯 살이 되고 법관 경력도 20년이 넘었다. 법도 조금 알게 되었고, 남의 말도 조금 알아들게 되었으며, 세상 물정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니었다. 대가를 치렀다. 열정이 예전 같지가 않고 도덕 수준도 낮아졌다. 야근도 별로 하지 않는다. 사건을 물고 늘어지지도 않고 모르는 사건이 있어도 남에게 묻지도 아니한다.
30대에 형사 단독 판사를 할 때 어느 지원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30대가 되면 단독 판사로 판결할 수 있다" "부처님도 득도한 때가 30대였고, 예수님도 돌아가실 때가 서른세 살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지금에 와서 풀어보자면 '세월의 부피가 아니라 세월의 무게가 중요하다. 그러니 나이의 적고 많음에 얽매이지 말고 세월의 무게를 체화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경험하여라'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상 물정에 밝으면서도 열정과 도덕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나이를 먹을 수는 없을까?
p.110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p.113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거창한 구호는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했던 말을 실천에 옮기고, 남을 비판할 때 썼던 그 잣대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제가 한때 이곳에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삶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p.122~123
일상의 대화에서 소통이 잘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을 먼저 표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을 말하는 게 바람직하다. 상대방의 잘못만 부각하는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한 것 같다. 즉 "Yes, But"이 "Not, Because"보다 낫다.
p.125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p.126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 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
p.129
"과거의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람들이 기억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p.132~139
여행은 잊는 것이다
여행은 기억하는 것이다
여행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여행이란 돌아갈 집이 있을 때 진정한 여행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방랑이겠지.
p.140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p.147
자연이 먼저였고 사람은 나중이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의 주인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포늪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가슴속에 각인하였다.
p.175
그 소나무
아침마다 해발 199미터 화지산을 오른다. 낮은 산이지만 오르내리는 데 힘든 순간이 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가 있다. 그 소나무는 언제나 침묵하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말의 깊이를 얻는다.
좋은 판사가 될 자신은 없지만 나쁜 판사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가끔 다짐해 본다.
p.194
칼 포퍼가 말한 것처럼 "추상적 행복을 증가시키기보다는 구체적 악을 제거하는 것"이 법관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내가 지금 여기 있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하였다.
판사에게 성공이란 단 한 사람의 당사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사법의 독립과 민주화는 결국 여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인생의 긴 여정에서 패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승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여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무승부도 있으므로 버틸 필요가 있고 그렇게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다.
브레히트는 "불의는 인간적이다. 그러나 더 인간적인 것은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p.199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한다
인간이 소유한 것은 시간뿐이다(에디슨).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에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배분해야 한다(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p.206~207
우리의 소원
좋은 세상이라서 할 일이 없다거나, 할 일이 있는 줄은 알지만 무력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러나 조금만 세상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악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선이 강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선이 강해지는 방법은 선이 선끼리 합치는 것이다.
p.233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
p.235
공부는 삶이다. 공부는 새로움이다. 공부는 즐거움이다. 공부는 깨달음이다.
p.236
지관 스님의 "불교에 외부란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 개종이란 자비심을 잃는 것을 뜻할 뿐이다"라는 말에 빗대어 게송을 읊듯 공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즉, 공부에 외부란 없다. 공부가 원초적 본능이자 삶의 모든 과정이라면 공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게 된다.
p.268
필승도 중요하지만 불패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이 특히 와닿았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 임하는 자세가 이러하였다고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서술하였다.
p.358
반성과 후회
형사부를 있으면서 몇 차례 기피 신청을 당했던 일, 직권 남용으로 고소당했던 일이 떠오른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피고인이 절차를 오해한 점에도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재판이라는 것이 결국 피고인을 설득하는 절차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피고인의 권리를 재판장의 아량쯤으로 생각한 나에게 있었다. 반성하고, 후회한다.
p.378
소망
지금은 헤어지지만 여러분이 법원에 들어올 때 품었던 그 뜻을 펼치시는 길에서 우리는 만날 것입니다.
p.383
제가 부산가정법원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 바로 거기에 인간적 존엄성이 존재한다"라는 칸트의 말은 부산가정법원을 운영하는 저의 좌우명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상대방은 사건 당사자나 민원인이기 이전에 존엄한 인간이라는 점이 우리의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p.388
여성이 살기 편한 세상은 남성도 살기 편합니다. 여성이 자유로운 세상은 남성도 자유롭습니다. 여성은 인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이 인권을 확대하는 데 앞장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p.403
둘째,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재판관과 재판관 사이에서, 재판부와 연구부 사이에서, 현재의 재판관과 과거의 재판관 사이에서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는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과 경청 후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는 성찰의 과정이 포함됩니다.
< 문예북흥 54회 문형배 재판관 편 - 2026.1.24. >
"호의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는 것, 누구나 할 수 있다"
"일관된 논리로 자기 길을 가라"
"나는 그렇게 기웃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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