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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Mars
스터디 기록/문학. 책

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by 박지은(MyMars) 2025. 9. 9.

 

<패티 스미스×사운드워크 컬렉티브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를 보고 너무나 큰 감명과 영감을 받아서, 다시 펼친 '저스트 키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도 좋았었지만, 전시에서 만난 그녀의 작품들과 삶의 궤적을 본 후 다시 읽으니 더욱 깊이 있게 다가왔다.

 

이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인연과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특별한 관계가 존재한다.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철없던 스물한 살, 뉴욕 브루클린의 한 서점에서, 가난하지만 빛나는 두 영혼이 만났을 때,

죽음조차 끊어낼 수 없는 운명의 매듭이 조용히 묶어지고 있었을까.

연인에서 친구로, 그리고 평생의 예술적 동반자로 발전해 가는 그들의 관계는 예술가에게 있어 진정한 이해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 준다.

기나긴 세월 동안 서로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지지해 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과 부러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패티 스미스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해 냈다.

시인에서 뮤지션으로, 때로는 시각 예술가로, 그녀는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진정성 있는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갔다. 록 음악과 시가 만나고, 문학과 퍼포먼스가 어우러지는 그녀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는 장르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밥 딜런, 짐 모리슨, 앤디 워홀, 윌리엄 버로우즈 등 그 시대의 문화 예술 아이콘들과 만남이 나올 때에는 나도 같이 가슴이 뛰었다.

'저스트 키즈'는 단순히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회고록이 아니라, 1960~7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계 전체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패티 스미스가 말했듯, 그들은 단지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두 아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열망이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저스트 키즈'는 예술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는 책이다.

예술가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 때로는 외롭고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갈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꿈이 있었다."

 

 

최근 큰 일을 겪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는 그 소식을 전하자 울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문득 유언장이라도 써놓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다시 보다가, 마지막 챕터인 로버트의 죽음에 관한 'Holding Hands with God'를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그 마음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영원히 이별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를 기리는 최고의 방식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 <저스트 키즈>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중에서

 

p.25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입체파의 창시자 피카소의 그림들이었다. 미술관에선 전시관 한 곳 전체를 피카소의 작품에 할애했는데, 그림을 통해 느껴지는 야생적인 자기 확신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

조금 쉬려고 가족들 모두 계단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름없이 축 처진 열두 살 소녀에 불과했지만, 전시회를 보고 나서 내면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것을. 인간이 창조한 예술에 깊이 감동받았고, 예술가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게 자질과 재능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진심으로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다. 예술가가 되라는 계시를 받는 걸 상상했고, 그렇게 되길 바랐다.

 

p.49

이런 일이 즐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곤 했다. “난 자유로워, 자유로워.” 하지만 그 주문은 며칠 후에 다른 말로 바뀌었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단 말이 먼저 나왔다. 그래도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고, 절대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이 계단에서 저 계단으로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며 지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존 콜트레인이 사망한 그해 여름, 도어스의 ‘크리스털 십(Crystal Ship)’이 휩쓴 여름이었다. 히피 청년들은 봉기했고, 중국은 수소 폭탄을 터뜨렸고, 지미 헨드릭스는 몬터레이 공연에서 기타를 불살랐다. 라디오에선 바비 젠트리의 ‘오드 투 빌리 조(Ode To Billy Joe)’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뉴어크과 밀워키, 디트로이트에선 폭동이 일어났다. ‘엘비라 마디간’의 로맨스로 가득 찬 여름이기도 했다.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대기 속에서 새로운 만남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해 여름에 나는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만났다.

 

p.90~91

나는 지난 한 세기의 잊힌 문화나 예술가에 탐닉하며 나만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문학소녀였던 나는 독립선언문의 유려한 문장과 우아한 필기체에 빠져 필사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필사체에 매료되었더랬다. 그때 갈고닦은 실력을 그림을 그릴 때 활용했다.

......

로버트와 나는 외부 세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우울하고 저조한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나는 예술을 창조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고민에 빠졌더랬다. 누구를 위한 걸까? 신을 모방한은 것에 불과한 일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과 소통하는 행위일까? 그래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뉴욕현대미술관(MoMA), 루브르 박물관 같은 예술의 위대한 감옥 안에 우리의 작품을 가두는 행위인 걸까?

진정성을 갈구했지만 내 안의 모순을 인정해야만 했다. 왜 작품 활동을 하는 걸까? 자아실현, 아니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본래의 의도와 의미보단 내 태도가 더 과장됨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고 앉으면, 베트남 전쟁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바깥세상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어떤 의미도,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정치적인 운동에 가담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바가 세상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형태로 관료주의에 영합하는 일이 아닐까 싶은 불안에 휩싸여, 가능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깨어 있고 정의로운 운동에도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로버트는 이런 자기성찰적인 물음에 대해서 조금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예술적 욕구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의 식대로라면 신의 뜻에 따른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열을 이뤄 한 편의 시가 되고, 물감과 흑연이 서로 엮여 종이 위에서 휘갈겨져 신의 움직임을 확대한 한 점의 그림이 된다는 것이었다. 신념과 수행이 완벽히 조화를 이뤄 걸작이 태어나고 영적인 안정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p.104

내용을 읽기도 전에 마음에 와닿은 건 바로 제목 몇 마디였다. “패티에게 보내는 로버트의 생각.” 집을 나오기 전에 그렇게도 많이, 사정을 해가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마음인지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는 항상 묵묵부답이었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심하고 꺼내기 어려운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려고 애썼을까 싶었다. 편지를 쓰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문을 연 것도 나고, 닫은 것도 나야”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두를 사랑했다. 섹스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싫어했다. 삶은 거짓이고, 거짓은 진실이다. 편지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로 끝맺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벌거벗고 서 있어. 신이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우린 같이 노래를 불러.” 예술가로서 로버트의 선언문이었다.

그의 고백들은 마음 한 곳에 밀어 두고 그 말들을 제병(가톨릭 성찬식 때 신부가 주는 과자)처럼 받아들였다. 나를 감동시켜 다시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을 테다. 나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집어넣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p.107~108

우린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했다. 나는 나를 넘어서 더 높고 다른 세계를 탐험하기 바랐고, 로버트는 자기 안의 세계를 추구하길 바랐다. 그는 자기 작품 속에서 표현되는 예술적 언어들을 탐구하고 그 요소들을 바꾸고 변형해 왔다. 사실상 지금까지 억눌러온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내적 변화를 기록하는 도구로서 창작 활동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동성애를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내게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나와 잘 지내기 위해서 자신의 분노들과 욕망을 외면하고 억눌러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라면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소심한 데다 관계를 망칠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 돌아왔을 때 로버트는 의기양양하면서도 뭔가 걱정스러워 보였다. 변해서 돌아오길 바라긴 했지만,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전보다 더 빛이 났는데 뭐랄까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에 가까웠고 떠나기 전보다 나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성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 관계를 지속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나로서는 그와 잘 지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로버트에게 테리라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처음으로 남자와 진지하게 사귄다고 하자 내가 주체할 수 없이 동요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육체적 관계를 맺고 사람들을 만났든지 간에 그것은 경험에 불과한 일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남자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테리는 갈색 곱슬머리에 잘생기고 친절한 남자였다. 벨트 달린 코트를 커플룩처럼 차려입고서 둘 다 자기가 너무 잘생기고 잘난 걸 잘 알고 있다는 듯 나르시시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둘은 거울 이미지처럼 비슷했다. 얼굴이나 신체적인 외형보다는 몸짓이나 분위기가 그랬다. 나는 둘 사이의 친밀함이나 사귀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들을 상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p.110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우린 뭐가 될까? 철없는 우리가 자신을 향해 항상 던지는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철없는 대답 또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되었다.

한동안 로버트는 나를 지켜주었고, 그리고 나에게 의지했고, 나를 소유하려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자기가 피운 꽃에 찔려 상처 입은 주네의 장미와 같았다. 난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알고 싶어 조바심 냈다. 하지만 그 욕망은 결국 우리가 미러볼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없는 빛들이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 둘은 마테를링크(벨기에 극작가, '파랑새'의 지은이)의 주인공 아이들처럼 파랑새를 찾아 나섰지만 새로운 경험이라는 장미 가시덩굴 속에 갇히고 갇히고 말았다.

로버트는 마치 내 쌍둥이 형제인 것처럼 반응했다. 내가 흐느껴 울고 있을 때 그의 짙은 곱슬머리가 내 머리카락에 엉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울음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가서 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그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두려웠고 우리 둘 다 서로가 만들어낸 눈물의 강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139~140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의 습관이 각성제 중독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정신 상태 때문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골목 가운데나 논리적으로 불가해한 끝없는 미로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앨리스와 미친 모자장수처럼 느껴졌는데, 끊임없이 핵심도 없는 농담과 수다를 건네는 그에게서 빠져나와 체스판 위에서 스텝들을 되짚어가며 나만의 세계,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세계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

“아무도 우리처럼 될 순 없어, 패티.” 그가 다시 이 말을 했다. 로버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시공간이 멈춘 듯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p.141

그 당시 세상은 뭔가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불가능의 영역이었던 달에 인간이 착륙한 사건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진주 위에 고무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 다니니 말이다. 그 시절, 처음으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느 때는 그냥 손을 들어 멈추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뭘 멈추라는 거지? 아마도 나이 드는 것 말이다.

 

p.182

아이들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들은 인형이나 장난감 로봇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작품을 대하는 예술가의 태도는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대하는 것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로버트는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작품을 위해서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건, 창작욕에서 발현된 것이든 성적 욕망에서건 그는 열쇠고리 하나도, 부엌칼이든 나무 판대기 하나라도 예술로 승화하는 재능을 지녔다. 그는 자기 작품과 물건들을 사랑했다. 한번은 승마 부츠랑 그림을 바꾸기도 했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지만 미적으로는 숭고하리만큼 아름다운 그 승마 부츠를 로버트는 남들이 그레이하운드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듯 정성스럽게 닦고 광을 냈다.

 

p.183

시를 쓰기는 하는데 완성을 못하겠다고 털어놓자 그는 폴 발레리가 한 “시인은 시를 끝맺지 않는다, 그저 버릴 뿐이다”라는 말을 들려주더니 덧붙였다. “걱정 마. 괜찮아질 거야, 친구.”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괜찮아질지 어떻게 알죠?”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p.205

방을 나서며 그는 프랑스제 골동품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예수의 발치 아래 ‘memento mori’라는 글귀가 새겨진 해골이 있었다.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뜻이지.” 그레고리가 말했다. “하지만 시는 그렇진 않아.”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떠나고 나는 의자에 앉아 담배 자국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위대한 시인이 남기고 간 흉터였다. 그는 언제나 말썽을 일으키고 손해를 입혔지만,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순수한 영감을 우리들에게 담뿍 주고 가곤 했다.

 

p.223~224

1960년대에 이 건물에 제너레이션 클럽이 오픈했고, 자주 드나들던 지미 헨드릭스가 클럽을 인수해서 최신 유행하는 뮤직 스튜디오로 개조한다. 이 건물은 그리니치 빌리지 52번대로 8번가 깊숙한 곳에 있다.

8월 28일에 스튜디오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초대장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파티 홍보를 맡은 업체에서 일하는 제인 프리드먼에게 티켓을 받았다. 제인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홍보한 주역이었다. 첼시 호텔에서 브루스 루도가 제인을 소개해주었고, 내 작업에 꽤 관심을 보였더랬다.

오프닝 파티에 간다니 신났다. 밀짚모자를 쓰고 시내로 갔지만 막상 문 앞에서 망설여졌다.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연히 지미 헨드릭스가 계단을 올라오다 시골뜨기처럼 홀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선 미소 지었다. 그는 런던에서 열리는 와이트 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려는 참이었다. 내가 들어가기 겁이 난다고 하자 지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뭇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자신도 수줍음을 많이 타고, 파티 같은 건 긴장된다고 했다. 그는 잠시 내 옆 계단참에 앉아서 이 스튜디오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비전을 말해주었다. 그는 다시 우드스톡을 열어서 전 세계 뮤지션들이 한곳에 모이는 음악 축제를 꿈꿨다. 음정이나 박자, 멜로디 같은 기술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불협화음일지라도 모든 사람들 마음속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통된 언어로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지미는 새 스튜디오에서 전 인류가 소통할 수 있는, 추상적이지만 만국 공통의 음악이라는 언어를 개발하고자 했다.

“평화의 언어, 당신이 추구하는 건 그거죠?” 내가 말했다.

그날 스튜디오 파티에 내가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미는 자신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

간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파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온 세계가 점차 순수함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좀 더 커서 세상을 더 날카롭게 바라보기 시작할 것일 수도 있겠다.

 

p.250

로버트는 필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빠른 눈썰미와 결단력 있는 촬영 요령 등 자기만의 방법을 익혀나갔다. 처음엔 필요에 의해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촬영했지만 나중엔 습관이 됐다.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일사불란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예술가와 모델로서 우리가 발견한 비법은 간단하다. 상대를 믿고, 자신을 믿는 것이다.

 

p.256

파격적인 란제리 디자인으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페르난도 산체스의 드레스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룰루와 맥심이 스키아파렐리가 디자인한 크레이프 소재의 빈티지 가운을 입으라고 했다. 검은색 상의는 브이 자로 파였고, 소매는 한껏 부풀렸으며 빨간 치마는 바닥까지 내려왔다. 척 보기만 해도 일곱 난장이를 만나러 가는 백설공주 드레스와 비슷했다. 로버트가 곁에서 웃겨 죽겠다는 듯 말했다. “그거 정말 입고 갈 거야?”

다행히도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못 입었다. 나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맞춰 입고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데이비드와 로버트는 검은색 넥타이를 했다.

맨해튼의 예술, 패션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즌 최고의 파티였다. 페르난도가 들어섰을 때 난 마치 버스터 키튼 캐릭터처럼 홀로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봤다. “달링, 매치가 끝내주는데?” 하고 말하며 내 손을 잡고서 검은색 상의와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셔츠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검은색 새틴 바지를 봤다. “그런데 흰색 스니커즈는 에러 같은데?”

“제 패션은 이게 포인트예요.”

“네 패션? 무슨 콘셉트인데?”

“애도 중인 테니스 선수요.”

페르난도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마구 웃었다. “완벽해!” 그러고는 파티 장을 안내했다. 내 손을 잡고는 이내 댄스 플로어까지 데려나갔다. 사우스 저지의 초등학교, 다시 그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댄스 플로어는 내 무대였다.

 

p.257~8

필라델피아 소재 미들어스 북스 출판사에서 펴낸 내 첫 시집, 소책자 '코닥'의 표지 사진은 로버트가 찍어주었다. 밥 딜런 산문시집 '타란튤라'처럼 찍길 바랐다. 그건 최고의 표지였다. 필름이랑 흰색 탭 칼라 셔츠를 샀다. 검은색 재킷에 셔츠를 받쳐 입고 레이밴 웨이페러를 썼다.

로버트는 선글라스 끼는 걸 탐탁지 않아했지만 내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는 커버로 쓸 만한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었다. “이제 선글라스랑 재킷 벗어봐.” 그러고는 흰 셔츠만 입은 채로 몇 장을 더 찍었다. 고른 네 장을 나란히 늘어놓고는 검은색 금속 필름 케이스를 집어 들어 한 장을 끼워 넣었다. 원하는 대로 나오질 않아서 필름에 흰색 스프레이를 뿌렸다. 로버트는 필름을 변형하거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활용했다. 통에서 서너 개 더 꺼내더니 스프레이를 뿌렸다.

‘손대지 마시오’라고 쓰인 통에서 쓸 만한 폴라로이드 필름을 매의 눈으로 샅샅이 찾아냈다. 촬영할 때의 로버트는 '욕망'의 주인공 데이비드 헤밍스를 많이 닮았다. 집착에 가까운 집중력과 벽 가득 작업물을 붙여 놓는 것 하며 고양이 탐정처럼 자기 작품에 스토킹에 가까운 애착을 보이는 점이 그러했다. 핏자국과 발자국과 흔적, 심지어 헤밍스의 대사마저 로버트의 개인적인 주문과 일맥상통했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면 / 자유로울 텐데 / 뭐에서 자유롭냐고? / 모든 것에서.’

 

랭보는 ‘새로운 풍경은 새로운 소음’이라 했다. 세인트마크스 교회에서 레니 케이와 함께한 공연 이후로 모든 일이 빠르게 돌아갔다.

......

특히 샌디 펄만은 내가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나조차 미래에 특정한 무엇을 해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피타고라스 정리에서부터 음악 후견인으로서의 성 세실리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어떤 주제든 설득력 있는 배경지식을 가지고 주장했다. 그의 놀라운 예지력의 중심엔 스스로 신화가 된 로커 짐 모리슨이 있었다. 짐 모리슨을 너무 추종한 나머지 그도 검은색 가죽 재킷에 가죽바지를 꽉 조이는 은제 버클이 달린 벨트를 맸다. 도마뱀 왕(짐의 모리스의 별명)은 상징이었다.

 

p.264

로버트와 나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성의 차이 때문에 격렬히 화를 내다가도 애정이나 유머 때문에 화해하고 했다. 서로 다른 것보단 닮은 점이 더 많아서 서로에게 끌렸지만 결국은 둘 사이의 균열은 더 커져갔다. 우리는 똑같이 서로에 대한 구속력으로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헤쳐왔다. 나에게 로버트는 장 콕토의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의 주인공 남매 폴과 엘리자베트처럼 숙명적으로 연결된 관계였다. 우리는 마치 어떤 모호한 보물을 가지고서 그게 뭔지 밝혀내려고 애쓰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뭐라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는 모습으로 지인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로버트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부정해서 비난받았고, 우리는 진짜 커플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궁당했다. 그로서는 동성애자라고 밝히면 우리 관계가 무너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감정을 재정의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모순에 부닥치게 되면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임을 나는 이미 로버트에게 배웠다.

 

p.298

멀리 무거운 코트를 입은 노부인이 거대한 가방을 끌고서 기다란 집게를 들고 서 있었다. 묘지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프랑스어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지만, 그 할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녀는 역겹다는 듯 무덤을 한번 보고 나를 한번 째려봤다. 무덤에 놓은 선물이나 그라피티 모두 그녀에게는 쓰레기 그 자체이리라.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중얼댔다. 그 노부인이 퍼붓는 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아 놀랐다. 갑자기 노부인이 돌아보더니 영어로 걸걸하게 소리쳤다. “미국인들이란! 왜 지네들 시인을 존중할 줄 모르지?”

굉장히 피로했다.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분필로 쓰인 글들이 빗물에 눈물처럼 번졌다. 선물과 담배꽁초와 기타 피크 들 사이로 김이 올라왔다. 오필리아의 꽃잎처럼 짐 모리스 무덤 위에 놓인 꽃잎들이 둥둥 떠다녔다.

“야!” 다시 노부인이 고함쳤다. “아메리껜, 대답해 봐! 왜 니네 새파란 젊은이들은 너네들 시인을 존중할 줄 모르지?”
“주 느 세 빠, 마담.” 나는 대답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어요.”

 

p.300

섣달 그믐날즈음엔, 우린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정 넘어서까지 레니와 나는 공연을 계속했다. 관객들은 광분해서 날뛰었고 공연장 안의 열기가 손에 잡힐 듯했다. 새해 첫날을 술렁이는 관객들과 함께 맞았고,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을 떠올렸다. 레니를 보고 말했다. “올해 내내 이렇게 지낼 거야, 오늘처럼 말이지.”

나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고, 레니는 코드를 잡고 기타를 쳤다.

 

p.316~317

작업 초기부터 이 곡을 연주하면서 내내 소화할 수 있을 거라 다짐했다. 레니가 알려준 대로 E 코드를 쳐보며 나는 가사를 읊조렸다. “예수는 누군가의 죄를 위해 죽었지만 나를 위한 건 아니었지.” 사회적으로도 행동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의미로 몇 년 동안 이 곡을 구상했다. 예수는 대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자신이 혁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레니가 그 사에 록 음악의 기본이 되는 E, D, A, 이 세 코드를 가지고 멜로디를 입혔을 때 나는 환호했다. 이 세 코드는 가사를 더 힘 있게 만들었다. “세 가지만으로 노래를 만들었구나?”

“가장 멋진 코드지.” 레니는 대답하고는 연주를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냈고, 리처드는 '글로리아' 연주를 시작했다.

 

p.318~319

말하자면 그날 밤은 왕관에 박힌 보석 같은 날이었다. 우린 하나가 되어서 연주했고, 리듬과 음을 환상적으로 맞추며 새로운 차원을 경험했다. 그러다 마치 토끼가 하운드가 다가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듯 누군가 나타난 것 같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 사람이었다. 그제야 공연장을 감도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이해됐다. 밥 딜런이 클럽에 온 것이다. 그가 왔다는 사실이 내게 신기한 영향을 미쳤다. 주눅 들기는커녕 더욱 힘이 붙었다. 그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 자신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고, 우리 밴드도 값지게 느껴졌다. 내게 그날 밤은 롤모델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존재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1975년 9월 2일, 일렉트릭 레이디의 문을 열고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수줍어하던 내게 말을 걸어준 지미 헨드릭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A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프로듀서인 존 케일은 조정실에 앉아 있었고, 레니와 리처드, 이반과 제이디는 녹음실에서 장비를 세팅하고 있었다.

5주 동안 첫 번째 정규 앨범 '호시스(Horses)'를 녹음하고 믹싱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시는 새 앨범 작업을 하진 못했지만 이 스튜디오를 남겼고, 일렉트릭 레이디는 미래의 문화적 토양을 일구려던 지미의 희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처음 녹음실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점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록큰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경이감은 청년기의 성장통을 이겨나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춤을 추면서 기쁨을 느꼈던 것처럼, 뮤지션으로서 사회적 자각과 행동을 통해 도덕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믿음을 '호시스' 앨범에 고스란히 담았다. 앞서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던 뮤지션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록곡인 '버드 랜드'는 피터 라이히가 아버지 빌헬름 라이히가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를 데려가길 기다리는 내용이고, '브레이크 잇 업'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속박된 짐 모리슨이 결국 자유를 쟁취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톰 베를레인과 내가 쓴 곡이다. '랜드'에선 와일드 보이 이미지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죽음이 겹쳤고, '엘레지'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곳에 걸쳐 우리가 잃어버렸고, 잃어가고 있고, 잃어갈 상실에 관한 곡이다.

 

'호시스' 앨범 커버를 로버트가 촬영하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내 음악이라는 칼에 맞는 칼집은 로버트의 사진밖에 없었다. 어때야 한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바란 건 진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단 하나 내가 로버트에게 요구한 건 티 하나 없이 깔끔한 셔츠를 입고 싶다는 것이었다.

 

p.322

프랭크 시내트라 스타일로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나는 포즈에 열중했고, 로버트는 빛과 그림자에 집중했다.
“빛이 났어.” 그가 말했다.
몇 컷 더 찍었다.
“됐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그는 그날 열두 컷을 찍었다.
며칠 뒤에 그는 내게 밀착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사진은 기적이야.”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날의 우리가 보인다.

 

p.325

필름의 내러티브를 보고 있자니 로버트와 내가 자주 토론하곤 하던 주제가 떠올랐다. 예술가는 신이 내려준 본능적인 감각으로 창작하려고 하지만, 신비롭고 영적인 세계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한다. 창작을 하려면 물질세계에 몸담아야 하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 현실적인 창작의 문제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천사와 우리 핸드메이드 월드의 잔재물들을 버리고 떠나며 말한다. “나는 '지구'를 택했어.”

 

p.330

하지만 로버트와 나는 서로의 작품을 여행하는 맨 처음 사람이었고, 둘만의 공간을 꾸며나갔다. 그가 없는 세계를 걸어나갈 때 나는 눈을 감고, 가족 조끼를 벗고 내 손을 잡고서 무한히 펼쳐진 새로운 대륙으로 나와 함께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p.346

“우린 애를 갖지 않았지.” 그가 후회되는 듯 말했다.

“작품이 우리 애야.”

 

p.347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갑자기 그가 바라보더니 물었다. “패티, 우리가 진정 예술을 찾은 걸까?”
나는 눈길을 피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다. “모르겠어, 로버트, 모르겠어.”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그런 걸 후회하진 않는다. 로버트 같은 바보가 아니면 예술을 찾아냈는지, 성자처럼 살았는지 따위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로버트는 내게 손짓해 일어나게 도와달라고 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패티, 나 죽나 봐. 너무 고통스러워.”

그는 사랑과 비난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사랑이 그를 구하진 못했다. 삶을 향한 그의 열망도 그를 구하진 못했다. 정말로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실감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견뎌내지 못할 고통을 그는 참아내고 있었다. 그가 너무나도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자, 나는 견딜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울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사랑 말고는 그에게 줄 게 없었다. 의자까지 그를 부축했다. 갑자기 기침은 멈추었다. 그는 내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앉아 있었을 때 그의 사진과 우리의 시 위로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가득 내려앉았다. 로버트는 죽어가고 있었고, 가만히 침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살아가기로 운명 지어진 나는, 그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 고요한 침묵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p.348

로버트에게.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는 날엔 너도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 생각하곤 해. 통증 때문에 괴로운 건 아닐까. 외롭진 않을지. 넌 어린 시절, 가장 어둡던 날들 속에서 나를 끌어내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축복받은 신비를 일깨워줬어. 나는 너에게 모든 걸 배웠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함께한 그 소중한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단 한 줄도 쓰지도, 그리지도 못했을 거야. 너의 작품은 자연스레 네 안에서 흘러나와 너의 젊음과 생을 기억하는 진실한 노래가 되었지. 그때는 하느님의 손을 잡겠다고 말했었지. 기억하렴, 로버트, 어떻게든 네가 잡은 그 손을 절대 놓치는 일 없이 꼭 붙잡고 있어줘. 놓지 말아줘. 네가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그날 오후에 말이야. 나도 잠깐 잠이 들었어. 하지만 잠들기 바로 전에 네 작품과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을 떠올렸어.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바로 너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바로 너야.

 

패티.

 

로버트는 참고 참아 견디려 했지만 벨벳 꽃잎처럼 무력했다. 정작 그를 고통스럽게 한 건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자각이었고, 그럴 때 그의 생각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띤 유형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은 그의 몸 위에 떠올랐다 갑자기 말없이 내려앉아 심장을 거세게 뛰게 하고, 불규칙한 박동에 피부는 가늘게 떨려와 마치 관능적이지만 숨 막히게 하는 잔인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p.356~7

못 다한 이야기

 

1989년 3월 8일, 로버트와 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를 통한 대화를 나눴다. 로버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실낱같은 희망이 전해지곤 했다. 내가 해줬으면 하는 게 없는지 물었을 때 로버트는 꽃들을 보살펴달라고 했고, 또 출간될 꽃 사진집의 서문을 써달라고 했다. 컬러 사진집이야. 네가 흑백사진을 더 좋아하는 건 잘 알지만, 맘에 안 들지도 모르겠다만 부탁할게. 맘에 들 거야. 쓰도록 할게. 나는 그에게 우리가 함께 해왔던 작업도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거라 말했다. 우리 얘기를 책으로 써줄래? 내가 그러길 바래? 그래 줘야 해. 그는 내가 아닌 그 누구도 쓸 수 없을 거라 했다. 쓸게, 약속할게. 이 약속은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사랑해, 패티. 사랑해, 로버트. 그리고 그는 휠체어를 타고 진찰을 받으러 사라졌다. 이후로 나는 그가 말하는 걸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로버트가 누워 있는 병실엔 그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

나는 '플라워즈' 사진집 서문을 썼고, 조앤의 부탁을 지켰다. 나는 로버트를 기리며 '코럴 해(The Coral Sea)'를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내가 적당한 말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로버트에 관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 말들이 아직 많다. 하지만 이 책이 내가 담아낼 수 있는 말이다. 그가 써주길 바랐던 사람이 나였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우리는 검은 숲속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 모험했던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혹도, 마녀도, 악마도 많았지만, 꿈꿨던 이상의 아름다움도 경험했다. 이 두 어린 소년, 소녀가 보내온 많은 날들과 밤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뭐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로버트와 나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가 나에게 남겨둔 과제, 그가 말했듯 우리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한다.

 

2010년 5월 22일
패티 스미스

 

p.372

언제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작 우리는 약간 후회만 하고선 어떤 기억을 서랍 속에 넣고 영원히 묻어버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오래된 손수건 속에 넣어 고이 간직해둔 조개껍질이나, 의미 있는 돌멩이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어느 오후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나쁜 운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피네간의 경야'의 교정본을 복잡한 택시 뒷좌석에 두고 내렸다가 기적적으로 그의 손으로 되돌아와 깜짝 놀라고 고마워했던 것처럼.

 

p.381

옮긴이의 글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두고 한 말이 있다. 주위엔 예쁜 여자들이 항상 많았지만 ‘예술적 온도’가 맞는 여자는 오노 요코, 단 한 사람이었다고.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이 스무 살의 어린 예술가 커플 또한 그렇게 서로를 알아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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