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필사. 184일 차]
생명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리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熱烈)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原始)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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