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필사. 72일 차]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 이병률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을 한다
존재에 대한 말 같았다
말의 감정은 과거로부터 와서 단단해지려니
나는 단단한 내 손목이 슬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인데도 비를 셀 수 없어 미안한 밤이면
매달려 있으려는 낙과의 처지가 되듯
힘을 쓰려는 것은 심줄을 발기시키고 그것은 곧 쇠락한다
찬바람에 몸을 묶고 찾아오는 불안을 피할 수 없어서
교차로에는 사고처럼 슬픔이 고인다
창가에 대고 어제 슬픔을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슬픔의 일부로 슬픔의 전부는 가려진다고 말해버렸다
저녁에 만난 애인들은
내 뼈가 여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검어지며 건조해져간다고 했다
손목이 문제였다
귀를 막을 때도 무엇을 빌 때도 짝이 맞지 않았다
손목 군데군데 손상된 혈관을 키우느라 밤을 지새울 예정이다
저 바람은 슬픔을 매수하는 임무로 고단할 것이므로
나는 이제 내 손목에게 슬픔을 멈추어도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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