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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Mars
스터디 기록/문학. 책

마의 산 -하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by 박지은(MyMars) 2025. 1. 12.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모두 읽기 독서 모임 #2] 

 

상권 초반에는 정말 힘들게 봤지만 "적응이 안 되는 것에 적응"하게 되고, 여러 인물들과 사건에 슬슬 재미가 붙으면서 중반 이후로는 속도가 쑥쑥 올라갔다.

<마의 산 -상>은 이렇게 끝난다.

 

쇼샤 부인에 대한 한스 카스토르프의 가련한 사랑은 결국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 지켜볼 수밖에 없는 19금 중요한 장면인데 마치 K-드라마처럼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궁금해서 하권을 바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권에서 잔소리쟁이 꼰대 아저씨 같던 세템브리니 씨는 하권에서 예수회 소속 나프타의 등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온화한 옆집 어르신 같이 느껴지고, 디오니소스의 화신 같은 페퍼코른과 함께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인 한스 카스토르프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의 3각 편대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 눔 자식은...

 

이 책을 볼 때 한창 몸이 안 좋던 시기라 죽음과 병원(요양원)에서의 생활, 의사와 환자의 관계, 정신과 육체, 삶의 끝, 공간의 특수성 같은 생각을 많이 하며 보았다. 

또한 시간, 예술(특히 음악), 사랑, 신념과 행동, 전쟁과 인간성 등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전체 1400페이지에 육박할 만큼 긴 소설이라 그만큼 할 얘기가 진짜 많은 책인데 자세한 건 한번 더 본 다음에 조금씩 부분으로 나눠서 써봐야겠다.

 


-알라딘 eBook <마의 산 -하>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중에서

 

p.10 - 2024.10.30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럼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라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것 속에 전후가, 무한한 것 속에 좌우가 있을 수 있을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p.14 - 2024.10.30

날이면 날마다 보는 게 덮인 눈이고 쌓인 눈이며 눈 쿠션이자 눈 비탈이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신과 마음이 질식할 지경이라고 불평들을 했다. 그래서 손님들은 녹색, 황색 또는 붉은색의 선글라스를 꼈지만 이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p.58 - 2024.10.31

곡선에는 방향이 같은 순간이 한 순간도 없어 잴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영원이란 '똑바로, 똑바로'가 아니라 회전목마처럼 '빙빙' 도는 거야.

 

p.98 - 2024.11.02

보기 흉하면서도-죄송합니다-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영혼의 세계와 표현의 세계의 산물은 늘 아름답기 때문에 추한 것이며, 추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겁니다. 그게 법칙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의 아름다움이지, 우둔하기 짝이 없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게다가 육체의 아름다움은 추상적이기도 합니다.” 나프타는 이렇게 덧붙였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추상적입니다. 현실에는 내면적 아름다움, 종교적 표현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p.131 - 2024.11.03

“정신이 주권자이며, 정신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정신이 윤리적인 세계를 규정합니다. 정신이 이원론적으로 죽음을 고립시키면 바로 그 죽음은 정신의 이러한 의지로 말미암아 실제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은 삶에 대립되는 독자적인 힘, 적대적인 원칙, 커다란 유혹이 됩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지요. 죽음은 음란한 욕망의 나라입니다. 왜 음란한 욕망의 나라인지 묻고 싶겠지요? 죽음은 분해되어 해체되기 때문이며, 죽음은 해방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사악한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사악한 해방입니다. 죽음은 윤리와 도덕을 해체하고, 기율과 절도로부터 해방하여 음란한 욕망을 품게 하는 자유를 줍니다. 

 

p.155 - 2024.11.03

“출발하는 날에 이렇게 날씨가 좋아지니 자못 유감이군. 고약한 일이야, 혹독하고 궂은 날씨라야 헤어지기 쉬운 법인데 말이야.” 한스 카스토르프가 말했다. 이에 대해 요아힘이 말했다. “헤어지기 어려워도 상관없어. 훈련하기 딱 좋은 날씬걸. 저 아래에서는 이런 날씨가 필요해.”

 

p.156 - 2024.11.03

열차에 올라타라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는 요아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요아힘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고, 요아힘의 진지한 두 눈에서는 슬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한스!” 그가 나직이 소리 내어 외쳤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곤혹스러운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평소에 하던 대로 ‘너’나 ‘이봐’로 부르지 않고, 예의범절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이루 말할 수 없이 곤혹스러울 정도의 열광적인 방식으로 “한스!” 하고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요아힘은 “한스!”라고 말하고는 자못 불안한 표정으로 사촌의 손을 잡았다. 그때 한스 카스토르프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여행 기분에 들뜬 채 충격에 빠져 있는 사촌이, 자신이 술래잡기할 때처럼 목을 바르르 떠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한스! 곧 따라와야 해!” 그는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는 열차의 발판으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문이 닫히고 기적이 울리자 바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기관차가 앞에서 끌기 시작하자, 열차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행객은 창밖으로 연방 모자를 흔들었고, 뒤에 남은 자는 마구 손을 흔들었다. 속이 온통 헤집어진 한스 카스토르프는 아픈 가슴을 안고 오랫동안 그렇게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년 전에 요아힘이 자신을 데리고 왔던 길을 따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p.163 - 2024.11.03

물론 이로 인해 만사가 끝장난다 하더라도 한순간의 절망적인 환희는 영원한 상실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고백은 폭력을 뜻하므로, 상대방이 혐오감을 품고 저항할수록 쾌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p.165 - 2024.11.03
두 사람은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로 마차를 타고 달렸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집게손가락을 들어 밤하늘의 장관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말과 몸짓으로 여기저기 반짝이는 별자리를 가리켰으며, 행성들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야메스 삼촌은 우주에 관한 일보다는 옆자리의 조카에게 더욱 관심을 쏟으며, 지금 여기서 이런 별자리 이야기를 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딱히 정신 나간 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할 이야기가 얼마든지 많을 텐데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p.167 - 2024.11.03               

“이곳 공기는 대단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신의 연소 작용을 촉진시키지만 몸에 단백질이 붙게 하지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질병을 고쳐 주는 힘도 지니지만, 처음에는 일단 병을 강하게 촉진시키고 전반적으로 유기체를 자극하고 앙양시켜, 말하자면 화려하게 병이 터져 나오게 하지요.” “화려하게라고?” “물론입니다. 삼촌은 병이 터져 나올 때 무언가 화려한 기분, 몸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나요?” “당연하지, 물론이고말고.” 삼촌은 아래턱을 덜덜 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p.185 - 2024.11.03

이렇게 하여 한번 떠나서는 영영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한스 카스토르프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려던 평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평지의 공격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갈 것을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던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일로 인해 저 아래 사람들과 자신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었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실패는 평지 사람들로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최종적으로 그를 포기하게 되었음을 의미했지만,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는 이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완전한 자유를 얻자 그의 가슴은 마침내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게 되었다.

 

p.206 - 2024.11.03

거기서는 감각의 감퇴 현상이나 고마운 마취 현상 및 상상력의 오류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고, 그것은 태양 아래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비열한 경험이었으며, 자기처럼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러한 비열한 것에 대해 결코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렴, 그렇지요, 네, 그렇고말고요!” 세템브리니가 이렇게 달래며 말했다. 페르게의 허탈감은 시일이 흐를수록 점점 더 대단한 경험이 되어, 나중에는 후광처럼 머리 주위를 둘러싸게 되었다.

 

p.208 - 2024.11.03

제멋대로 하는 행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많은 경우에 바보 같은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커다란 걱정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중하게 운명의 타격을 받았을 때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는 나 자신을 비롯하여, 어느 누구라도 정신 나간 자를 그냥 노려보면서, 그의 허튼 짓거리에 대해 가차없는 이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잠시나마 그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p.253 - 2024.11.03

주변의 정적은 공허하고 무표정하기 짝이 없었다. 눈멀게 하는 하얀 공허를 바라보느라 눈이 부신 동안 그는 위로 갈수록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p.264 - 2024.11.03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견지에서 볼 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순전히 감독 역할을 맡은 이성이 확인한 일이었다. 걱정을 해 주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 남남 같은 이성이 확인한 일이었다.

 

p.274 - 2024.11.03

그때 이탈리아 테너 가수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예술의 힘이 청중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는 시종일관 아름다운 고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열정적인 아름다운 음은 순간순간 꽃봉오리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조금씩 열렸고, 점점 더 찬란한 빛을 발하며 밝아져 갔다. 아무도 그때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베일이, 말하자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져 나가 가장 바깥쪽의 가장 순수한 빛을 드러내는 마지막 베일, 설마라고 생각한 마지막 남은 베일까지도 벗겨져 광채와 눈물에 아롱거리는 장엄함이 넘쳐흘렀다. 그러자 청중은 거의 이의와 항의처럼 들리는 환희의 신음소리를 뱉어 내었고, 한스 카스토르프 청년도 거의 흐느껴 울 정도였다.

 

p.284 - 2024.11.03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모험이 없으면 삶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인간의 상태가 신비스러운 공동체와 미덥지 못한 개별 존재 사이에 있듯이, 신의 아들인 인간의 본성은 그 한가운데, 모험과 이성의 한가운데에 있어.

 

p.284 - 2024.11.03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우아하고 정중하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자기 자신을 대해야 해. 인간만이 고귀한 존재며, 대립은 고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인간은 대립을 다스리는 주인이고, 대립이란 인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한 거야. 인간은 죽음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두뇌의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죽음보다 고귀한 존재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정신의 경건함을 가졌기 때문에 삶보다도 고귀하다. 이렇게 나는 하나의 시를, 인간에 관한 꿈결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며, 선하게 살고자 한다. 나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지 않으련다! 착한 마음씨와 인간애의 본질은 이런 것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위대한 힘이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걸으며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과거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 깃을 달고 있으며, 인간 자신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여 엄숙하게 검은 옷을 입는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성이란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이자 방종한 모험이고, 무형식이자 색욕이기 때문이다. 나의 꿈에 의하면 죽음은 색욕이지 사랑은 아니다. 죽음과 사랑-이것은 배합이 맞지 않으며,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운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형식도 오로지 사랑과 착한 마음씨에서 생기는 것이고, 분별력 있고 우호적인 공동체와 인간의 아름다운 나라의 형식과 예의바름은 피의 향연을 조용히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 이렇게 나는 선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p.292 - 2024.11.04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알고 있어.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사실 영혼과 육체를 대립시키는 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하는 점이고, 오히려 양자가 서로 결탁하여 미리 짜고 시합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야. 다행히도 이상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착한 요아힘, 누가 너와 너의 지나친 열의를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너의 의도는 성실해. 하지만 이제 육체와 영혼이 결탁하고 있다면 성실성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내가 묻는 거야.

 

p.325 - 2024.11.04

“좋습니다, 우리 웃읍시다!” 그가 말했다. “나는 언제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웃음은 영혼의 번쩍임이다’라고 어떤 옛날 사람이 말했습니다. 

 

p.349 - 2024.11.04

사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p.349- 2024.11.04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p.357 - 2024.11.04

나는 죽음을 알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죽음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죽음을 과대평가한다는 내 말을 믿어 주십시오! 죽음이란 거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죽기 전에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일도 있지만 이는 죽음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경우는 산 채로 잡혀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처럼 살아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에 대해 무언가 제대로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생겨나 어둠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두 어둠 사이에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하지만, 시작과 끝, 즉 출생과 죽음은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주체적인 성격을 갖지 못하며, 자연적 사건으로 객관의 영역에 속할 뿐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p.359 - 2024.11.04

그렇다, 요아힘은 이 수염으로 말미암아 별안간 젊은이에서 어른이 되었는데, 어쩌면 단지 수염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태엽이 끊긴 시계처럼 순식간에 일생을 마쳤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달할 수 없는 연령층을 눈 깜짝할 사이에 통과해 마지막 24시간 만에 노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심장이 쇠약해져 얼굴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어 올라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죽는다는 것이 적어도 대단히 힘든 일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여러 가지 감각이 상실되고 감퇴하는 바람에 이를 잘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입술 부분이 가장 심하게 부어 올랐고, 입 안이 바싹 말라붙거나 신경이 없어지는 바람에 요아힘은 말을 하려 해도 노인처럼 우물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그 자신도 이러한 장애 현상에 정말 화가 나서 이것만 없어도 모든 일이 잘될 텐데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성가신 일이라고 했다.

 

p.359 - 2024.11.04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그는 반항하는 태도를 보였고, 근엄하고 퉁명스럽게, 즉 불손해졌다.

 

p.361 - 2024.11.04

그러고는 그도 서서 울었는데, 일찍이 영국 해군 장교를 그토록 애태우게 했던 눈물이 그의 두 뺨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맑은 액체는 세계 어디서나 어느 때고 아낌없이 쓰라리게 줄줄 흘러내려, 어떤 시인은 이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라고 읊었던 것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심한 고통을 받을 때 신경이 충격을 받아 우리의 몸에서 짜내는, 염분을 지닌 알칼리성 선(腺) 분비물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눈물에 점액소와 단백질이 조금 함유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p.367 - 2024.11.04

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 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 나누고’, 시간에 ‘내용을 부여하여’,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p.367 - 2024.11.05

시간이 삶의 기본 요소이듯이, 시간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이다. 시간이 공간 내의 물체와 결부되어 있듯이, 시간은 이야기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시간을 재고 나누며, 시간을 짧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값지게도 하는 음악의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말했듯이 음악은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야기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 예술 작품처럼 단번에 눈에 들어오며, 물체로서만 시간에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연속적으로만, 시간이 경과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p.368 - 2024.11.05

이야기와 음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음악의 시간적 요소는 단 한 가지뿐으로, 그것은 인간의 지상의 시간을 잘라내 구분 짓는 일이다. 구분된 부분에 음악이 흘러 들어가, 그것을 말할 수 없이 고상하게 드높이는 것이다. 반면에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이야기 자신의 시간,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타나는 데 필요한 음악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서술 시점과 관련되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른 시간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주 달라서, 이야기의 허구적인 시간이 음악적 시간과 거의, 아니 꼭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 「5분 왈츠」라는 음악 작품은 5분간 지속되는 곡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에 대한 그 왈츠 곡의 관계는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 시간이 5분인 이야기, 그 5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나름대로 극단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한다면 5분의 천 배도 걸릴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허구적인 내용 시간 5분에 비해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겠지만, 아주 짧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의 내용 시간이 엄청 길게 지속되는 바람에 이야기를 대폭 줄여서 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가 ‘줄여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환상적인 요소, 아주 명확히 말하면 여기에 분명히 관련되는 어떤 병적인 요소를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야기가 연금술적인 마술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현실적인 경험의 어떤 비정상적인 사례나 분명히 초감각적인 것을 나타내 주는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아편 복용자의 수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편에 취한 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온갖 환상을 두루 겪는다고 한다. 그 환상의 시간적 범위는 10년, 30년, 아니 60년에 달하거나, 또는 심지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상의 허구적인 시공간은 실제로 이야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엄청 초과하여, 시간 체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약인 하시시 복용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취된 자의 뇌에서 ‘망가진 시계의 태엽마냥 무언가가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온갖 상념이 밀려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편 복용자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간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기본 요소인 시간이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지나친 말이긴 해도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처음에 그래 보였던 것과는 달리 결코 이치에 어긋나는 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대 소설’이라는 명칭에는 독특하게 몽상적인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정말 시간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p.370 - 2024.11.05

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대 소설’이면서 ‘시간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p.371 - 2024.11.05

오히려 특정한 조건 아래서는 우리들 중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시간의 흐름, 즉 자신의 나이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의 내부에 시간을 감지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외부의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시간의 경과를 대충이라도 그럴듯하게 맞힐 능력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p.371 - 2024.11.05

극히 혼란스러운 조건에서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 몰라서 시간을 과대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짧게 체험하는 경향이 있다.

 

p.374 - 2024.11.05

호기심어린 흥겨움이 섞인 일종의 두려움과 아울러 예의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이는 황홀과 현혹이라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현기증이었다. 그리하여 ‘아직’과 ‘다시’를 더는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섞여 뒤범벅이 되면 시간이 없는 언제나와 영원이 되는 것이다.

 

p.374 - 2024.11.05

한스 카스토르프는 몇 분간이라도 시간의 흐름을 막고 멈추게 하여, 시간의 꼬리를 잡기 위해 초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침은 차례로 다가와 맞닿았다가 스쳐 지나가기를 반복하는 숫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초침은 목표며 눈금이며 부호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60이라는 숫자가 있는 곳에 일순간 멈추어 서든가,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여기서 무언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신호를 조금이라도 보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초침은 아무런 숫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곳과 마찬가지로 60이라는 숫자가 있는 곳을 황급히 지나쳐 버렸다. 이런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초침에게는 도중의 숫자나 구분이 단지 밑에 있는 것에 불과해서, 초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계속 움직이고 또 움직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한스 카스토르프는 글라스휘텐제 시계를 다시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p.377 - 2024.11.05

여러분은 걸어가고 또 걸어간다. 여러분은 시간으로부터, 시간은 여러분으로부터 사라져 버려, 여러분은 산책을 하다가 결코 제 시각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 바다여, 우리는 그대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대를 생각하며 그리워한다. 지금까지 남몰래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대는 분명히 큰 소리로 불려 나온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해야 한다.’ 파도 소리가 솨솨 하는 황량한 바다, 칙칙한 연회색 하늘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비릿한 습기가 사방을 가득 채우며, 짭짤한 소금 맛이 우리의 입술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화롭게, 아무런 심술 없이 이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 우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마비시켜 주는 이러한 위대하고 광활하며 온화한 바람에 귀를 감싸인 채, 해초와 조그만 조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폭신폭신한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어간다. 우리는 모래 위를 한없이 거닐며, 너울거리며 밀려왔다가는 다시 물러가는 흰 포말이 혀를 내밀고 우리의 발을 핥으려는 것을 본다. 파도는 부서져 흰 거품을 일으키면서 밝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평평한 해변에 비단처럼 쫙 깔린다. 이렇듯 여기저기에, 저쪽 모래사장에서, 이렇듯 혼란스럽게 사방에서 들려오며 부드럽게 솨솨 하는 굉음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깊은 안도감에 빠지며, 알다시피 망각에 빠진다. 영원의 품에 안겨, 우리 그만 눈을 감도록 하자! 아니, 보라, 저기 거품이 이는 회색과 녹색의 광활한 바다, 아마득한 수평선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소실되어 버린 것 같은 저 바다에 돛단배 한 척이 떠 있다. 저곳에? 저곳이란 무슨 말인가? 저곳은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여러분은 알지 못하리라. 여러분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머리가 아찔해질 것이다. 이 배가 해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배 자체가 물체로서 크기가 얼마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작고 가까울까, 아니면 크고 멀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여러분의 눈빛이 흐려지고 만다. 여러분 속의 어떤 기관이나 감각도 그 공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어간다. 벌써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얼마나 멀리 걸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걷고 또 걸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고, 저곳은 이곳과 마찬가지며, 아까는 지금과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는 시간이 없어져 버리고, 가도 가도 똑같다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움직임은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것이며, 움직임이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곳에서는 시간도 없다.

 

p.378 - 2024.11.05

중세의 학자들은 시간이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고, 인과 관계 속에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감각 기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물의 진정한 본질은 영원한 현재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을 한 학자는 영원의 쓴맛을 약하게 입술에 느끼며 해변을 산책하던 중이었을까? 

 

p.378 - 2024.11.05

인간의 인식 방법과 형식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의 온전한 타당성을 의문시하는 것은, 이성의 경계선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결부되어 있다면 불합리하고 파렴치하며 모순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성이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선다면 이성은 자신의 본래적인 과제를 소홀히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운명에 관계하고 있는 젊은이한테 어떤 기회에 아주 우아하게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이라고 말하고, 교육자다운 단호한 어조로 형이상학을 ‘악’이라고 부른 세템브리니 씨와 같은 남자에게 우리는 그저 고마워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판적 원칙의 의미와 목표 및 목적은 책임감과 삶의 명령이라는 오직 한 가지일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고인이 된 사랑하는 요아힘을 추모하기로 하자. 그렇다, 법칙을 정하는 최상의 지혜는 이성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이를 분명히 표시하면서 바로 이 경계선에 삶의 깃발을 꽂아, 그 깃발 아래에서 근무하는 것을 우리 인간의 군인적인 책무라고 천명했다. 우리는 군인인 요아힘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수다쟁이 베렌스가 말한 ‘지나친 열성’으로 치명적인 결말을 맞이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엉망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영혼과 심하게 못된 장난을 치는 한스 카스토르프 청년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p.431 - 2024.11.07

우리 이야기의 본질이 허락하는 한 적어도 시간의 흐름을 존중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아도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은 아니고, 얼마 안 있으면 우당탕 끝나 버릴 테니까! 그 말이 너무 시끄럽다면 후닥닥 끝나 버릴 것이다! 초침이 마치 초를 재기라도 하듯 우리의 시간을 재면서 총총걸음으로 지나간다. 그러면서 초침은 냉정하게 정점을 지날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

 

p.468 - 2024.11.08

열정적이라는 것은 삶 그 자체를 위해 산다는 말인데, 잘 알다시피 독일인은 경험을 위해 사니까요. 열정이란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래요, 그것이 혐오스러운 이기주의이며, 언젠가 그로 인해 당신네들이 인류의 적이 될 거란 사실을 모르세요?

 

p.469 - 2024.11.08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지, 또는 삶을 위해 사는지 우리 자신도 모를뿐더러 아무도 그것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 수 없어. 내 말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거야. 이기적인 헌신도 있고, 헌신적인 이기주의도 있거든. 사랑의 경우도 대체로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p.472 - 2024.11.08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의 결과로 나는 오래된 딱지와 새로운 상처를 달고 다녀.

 

p.473 - 2024.11.08

여기서 사육제 날 밤에 그랬듯이, 나는 이미 소년 시절에 너에게서 무분별하게 연필을 빌린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 무분별한 사랑이 천재적인 표식이야. 죽음이란 알다시피 천재적인 원칙이고 이원론적 원칙이며 지혜의 돌이자, 교육적 원칙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죽음에 대한 사랑은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 가니까. 발코니에 누워 있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이런 것이었어. 그리고 너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기뻐 가슴이 벅차. 삶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평범하고 직선으로 나 있는 반듯한 길이고, 다른 길은 죽음을 통과해 가는 사악한 길인데, 그게 바로 천재적인 길이야!”

 

p.479 - 2024.11.09

아주 경건한 사랑에서부터 지극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언어가 하나의 단어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위대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그것은 애매모호함 속의 완전한 분명함이다. 사랑이란 아무리 경건한 사랑이라 해도 비육체적일 수 없으며, 아무리 육체적인 사랑이라 해도 불경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교활한 친근성으로 나타나든, 최고의 열정으로 나타나든 간에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유기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며 부패할 운명을 지닌 육체를 감동적일 정도로 관능적으로 껴안는 것이다.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열정이나 미쳐 날뛰는 열정에도 그 속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애매한 의미라고?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제발 애매한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의미가 애매하므로 사랑에는 삶과 인간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가 애매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절망적일 정도로 교활하지 못하다는 걸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p.493 - 2024.11.09

그녀를 ‘너’라고 부른 그날 밤이 깊어 감에 따라 ‘너’라는 호칭은 꿈결 같고 무책임하게 완전한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이와 동시에 클라브디아가 이곳을 떠나기 전날 밤이기도 했습니다.”

“완전한 의미를……” 페퍼코른은 따라 말했다. “당신은 아주 점잖게……”

 

p.514 - 2024.11.09

하지만 최고이자 궁극적이며 몸서리쳐질 정도로 은밀한 문제인 육체와 영혼에 관해서는 누구나 관심을 갖는 통속적인 문제입니다. 누구나 그 일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일로 괴로워하는 자, 낮에는 육욕에 들볶이고 밤에는 치욕의 지옥에 빠지는 자를 비웃을 수 있습니다.

 

p.578 - 2024.11.11

정신적인 대상, 즉 중요한 대상은 사실 자신을 뛰어넘어 먼 곳을 가리키고, 좀 더 보편적인 정신적인 세계, 감정과 신념의 전체 세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는 그 대상 안에서 다소간 완전한 상징을 발견하였는데, 그 상징의 정도에 의해 그 대상의 중요도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대한 사랑 역시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러한 사랑은 그것을 품고 있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 주며, 그 대상이 대표하는 세계, 의식하든 안하든 간에 함께 사랑받는 보편적인 세계와 대상의 관계를 여실히 나타내 준다.

 

p.579 - 2024.11.11

「보리수」 가곡의 세계, 물론 그 세계를 기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상징하는 가곡, 그 가곡에 대한 사랑을 불길한 예감을 갖고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성숙하게 했고, 그 세계와 가곡과 사랑, 이 세 가지를 양심상의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이 사랑에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론 사랑의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의구심은 사랑의 맛을 더하는 향료이다. 이러한 의구심이야말로 사랑에 정열의 가시 면류관을 얹어 주는 것이므로, 바로 그 정열을 회의적인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 매혹적인 가곡과 그 가곡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좀 더 고상한 의미에서 허락된 것인지의 여부에 양심상의, 술래잡기상의 의구심을 품은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양심의 예감에 따르면 금지된 사랑의 세계여야 하는 이러한 배후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의 세계였다.

 

p.605 - 2024.11.11

그렇다, 꿈을 기억해 붙잡아 두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듯 그 시의 대부분은 아쉽게도 벌써 잊혀졌다. 

 

p.610 - 2024.11.11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인간성을 존중하도록 하시오, 엔지니어 양반! 명쾌하고 인간다운 생각을 신뢰하고, 빗나간 생각이나 정신적으로 불결한 것을 혐오하도록 하십시오! 속임수라니까요! 삶의 비밀이라고요? 사랑하는 친구! 사기와 현실을 결정하고 구별하는 도덕적인 용기가 무너지는 곳에서는 삶 그 자체, 판단이며 가치, 혁신적인 행위가 끝장나고, 도덕적인 회의가 끔찍한 분해 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선과 악, 진실과 사기를 인식하고 판별하는 인간의 권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이러한 창조적 권리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인간을 미혹에 빠뜨리려고 하는 자는 화를 입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디깊은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게 더 낫다.*

 

2024. 12. 8.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한 달에 한 권씩 읽어나가는 1x년 프로젝트 2번째 모임 @이너커피 홍대
고난했던 '마의 산' 하산!  덕분에 독서 근력 빵빵해짐 @어쩌다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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