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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Mars
스터디 기록/문학. 책

마의 산 -상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by 박지은(MyMars) 2025. 1. 11.
 

 

2024년을 돌아보면 힘든 일이 참 많았지만 좋았던 일도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독서 모임에 참여하며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그동안은 그냥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글을 쓰며 나만의 세계에서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소화했었다. 

언젠가부터 타인과의 소통에서 내 생각을 말로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리고 사고의 확장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여러 인연으로 다양한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해진 책을 읽고 느껴진 감성이나 생각을 나누고 작가나 그 시대상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책을 다각도로 보게 되면서 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

어려운 책들을 기한에 맞추려고 억지로라도 읽어나가며 매일 책 읽는 습관도 자리 잡히고, 덕분에 혼자라면 완독 하지 못했을 책을 많이 읽게 되어 그 과정에서 조금은 성장하게 된 고마운 한 해였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모두 읽기 독서 모임 #1] 

 

작년에 시작한 독서 모임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완독 모임이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순서대로 매달 한 권씩 함께 읽어나가는 이 프로젝트는 지금 137권까지 나온 전집의 규모로 봤을 때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책들이 나올 테니 출판사가 너무 열심히 일을 하면 평생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원대한 프로젝트의 소식을 듣자마자 신나서 백 권짜리 이북 세트를 바로 질러버렸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1738234

 

[전자책] [세트] 을유세계문학전집 (총100권)

정통 문학 전집의 부활BR 1959년 국내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선보였던 을유문화사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50년 만에 새롭게 부활한, 정통 문학 전집입니다.BR 전문 편집위원단과 편집부의 작품

www.aladin.co.kr

 

그러나...

첫 권이 <마의 산>이라서 정말 '마의 산'에 부딪혔다.
보다가 어느새 잠들어버리기 일쑤에 눈으로 너무 안 읽혀서 TTS 틀어 놓기도 하고 앉아서도 보고 서서도 보고 침대에 누워서 프로젝트로 천장에 쏴서도 보고 짐에서 자전거 타면서도 보고, 별 생쑈를 다하며 완독을 위해 엄청 노력을 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고 나는 그 사이에서 "적응이 안 되는 것에 적응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지만 다 읽고 나니 왜 이 책이 그렇게 명작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아도 무릎을 치게 되는 명문이 수두룩하다.

올해 '열린책들' 버전으로 한번 더 볼 예정!

 

밀리의 서재에 있다

독서노트 -알라딘 eBook <마의 산 -상>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중에서


p.16 - 2024.09.03
여행자와 고향 사이에서 구르고 돌며 도피하듯 멀어져 가는 공간에는 보통 시간에만 있다고 생각되는 힘이 깃들어 있다. 공간도 시시각각 시간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시간을 훨씬 능가하는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는 못한 반면에 더 신속하게 나타난다.

p.54 - 2024.09.04
소년은 이미 옛날에 이런 일을 해 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반쯤은 꿈꾸는 듯하고 반쯤은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이상야릇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단조로워서, 전진하는 동시에 정지해 있는 것 같고 변하면서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이는 소년이 세례반을 볼 때마다 느낀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러한 기분을 느끼기를 기대하고 희망했다. 정지해 있으면서도 변화하는 듯한 이 상속품을 자꾸 보고 싶은 것은 이러한 기분에 잠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p.66 - 2024.09.04
그는 빈혈기가 조금 있어 학교에서 돌아와 세 번째 식사를 할 때면 매일 흑맥주를 한 잔 가득 마셨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것은 영양분이 풍부한 음료라서 하이데킨트 박사는 그것이 조혈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것은 다행히도 한스 카스토르프의 생명력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하여, 외종조부 티나펠의 말대로 ‘멍하니 조는’ 버릇, 즉 입을 헤 벌리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꿈꾸듯이 허공을 바라보는 버릇을 더욱 조장했다.

p.71 - 2024.09.04
시대가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않는데도, 꼭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는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려면 영웅적 속성인 흔히 볼 수 없는 정신적 고독과 자주성, 또는 식을 줄 모르는 활력을 필요로 한다. 

p.72 - 2024.09.04
특히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의 연록색이 무척 정성이 담긴 숙련된 솜씨로 그려져 있어서 누구나 티나펠 영사에게 “재주가 있어, 훌륭한 해양 화가가 되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영사는 이러한 칭찬의 말을 그에게 차분히 전할 수 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 말을 듣고 그저 선량하게 웃었을 뿐 화가가 되겠다는 과대망상을 품거나 화가가 되어 굶어 죽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p.101 - 2024.09.10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서 최고의 쾌감, 어쨌든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종일 담배를 피울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기분이 황홀해져. 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담배를 피우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사실 식사를 하는 이유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야. 
 
p.102 - 2024.09.10
이는 바닷가에 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 기분이야. 사실 바닷가에 누워 있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게 되지, 일도 오락도 말이야. 다행히도 세계 어디를 가든 담배를 피우지 않는 곳은 없어. 내가 아는 한 담배를 모르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극지 탐험가조차도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견뎌 내기 위해 담배를 넉넉히 준비해 간다고 그래. 나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공감하며 깊은 감동을 받아. 자칫하다간 커다란 곤경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내가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담배만 남아 있다면 이를 견뎌 낼 것 같아. 시가가 나를 곤경에서 구해 주리라 믿어.”

p.107 - 2024.09.10

“그들 모두가 무척 자유롭기 때문이야.” 요아힘이 말했다. “말하자면 젊은 사람들이라 이들에게 시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라 그래. 그러니 심각한 표정을 지어 뭐 하겠나. 나는 때때로 병과 죽음이란 결코 심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빈둥거림이란 생각이 들곤 해. 심각함이란 엄밀히 말하면 저 아래의 생활에나 있는 거야.

p.111 - 2024.09.10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거야. 모자를 벗으려고 해도 벗을 모자도 없고……”

“바로 그 말이야!” 한스 카스토르프가 또 한 번 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모자를 쓰고 다녀야지! 이 위의 사람들이 모자를 안 쓰고 다니는 게 정말 이상해 보였어. 모자를 벗어야 할 기회가 생기면 벗을 수 있도록 모자를 쓰고 다녀야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

p.118 - 2024.09.22

화창한 아침이니까요!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웃고 있습니다.

P.166 - 2024.09.23
명예는 중요한 특전을 주지만, 불명예도 이에 못지않은 특전을 주는데, 오히려 불명예의 특전이 무제한의 성질을 지닌다. 자신이 시험 삼아 알빈 씨의 입장이 되어서, 명예의 부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영원히 불명예의 무한정한 특전을 누릴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청년은 방종한 감미로운 감정에 화들짝 놀라 그의 심장은 잠시 한층 더 격하게 뛰었다.

p.134 - 2024.10.19

춥고 습한 날이나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불어오는 날에 집 현관에서 아버님의 서재로 들어가면 따스함이 부드러운 외투처럼 어깨를 감싸 주었고, 눈에는 훈훈한 눈물이 고였지요.


P.135 - 2024.09.23
세템브리니는 혀를 부수어 버리겠다는 듯이 발음했다. “크로코프스키, 

p.136 - 2024.09.23

그런데 병이 있는데 우둔하다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이런 표현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우둔하면서도 아프다는 게 정말 특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됩니다.

P.141 - 2024.09.24
하지만 그가 터득한 말하는 법은 들어 볼 만해. 말마다 그의 입에서 둥글둥글하고 아주 맛있게 튀어나오거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늘 갓 구운 빵이 생각난단 말이야.

 

p.145 - 2024.9.24 
매일매일이 똑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가 시간을 체험하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고, 그 시간의 체험은 생활 감정 자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한쪽이 약화되면 다른 쪽도 이에 따라서 딱하게도 손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루하다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다. 대체로 내용이 재미있고 신기한 경우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는 반면 단조롭고 내용이 없는 경우는 시간이 잘 가지 않고 더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내용이 없고 단조로운 것은 사실 순간과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르나, 아주 커다란 시간의 단위일 경우에는 이를 짧게 하고, 심지어 무(無) 같은 것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시간과 나날이 짧게 생각되고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 단위를 아주 크게 하여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시간의 흐름에 폭, 무게 및 부피가 주어진다. 그리하여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며 가벼운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 현상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하루같이 똑같은 경우 오랜 기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체험되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또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나중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한다. 다른 생활에 새로이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우리의 시간 감각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시간 체험을 갱신하고 강화하며 더디게 하여 이로써 우리의 생활 감정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소와 공기를 바꾸고, 온천 여행을 하는 목적도 이 때문으로, 기분 전환과 부수적 사건을 통해 심신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다.

p.153 - 2024.09.24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이 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다들 멋있는 검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는 관을 바라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평소 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나는 사람들이 가끔은 좀 경건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해.

p.228 - 2024.10.10
“명령을 받고 듣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템브리니가 대꾸했다. “주간 행사로 듣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약국 냄새가 나고, 건강 위생상의 이유로 위에서 강요하는 음악은 싫어합니다. 나는 나의 자유를, 우리 같은 사람에게 남겨져 있는 약간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하는 편입니다. 당신이 대체로 우리들 곁에 청강생으로 있듯이, 나는 이런 행사를 하면 청강생으로 참석합니다. 나는 여기 와서 15분 정도 얼굴을 내밀고는 다시 내 갈 길을 갑니다. 이것이 나에게 독립이라는 환상을 줍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환상 이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만족감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요! 당신 사촌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근무지요. 그렇지요, 소위님, 당신은 이것도 근무의 일부라 생각하시지요. 아, 나는 알고 있지요. 당신이 노예 상태에서도 자부심을 잃지 않는 비결을 알고 있다는 것을요. 대단한 비결이지요. 모든 유럽 사람이 다 그런 비결을 터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음악 말입니까? 내가 음악 ‘애호가’인지 물으셨지요? 그런데 당신이 ‘애호가’라고 말한다면 (그렇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표현을 선택한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경쾌한 느낌을 주니까요. 좋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래요, 나는 음악 애호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음악을 유달리 존중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령 정신을 담는 그릇이자 진보의 도구이며 찬란한 쟁기인 ‘말’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아닙니다. 음악이라…… 음악은 애매모호하고 미심쩍은 것이며 무책임하고 냉담한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명확한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겠지요. 하지만 자연도 명확할 수 있으며 시냇물도 명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건 진정한 명확함이 아니라 꿈꾸는 듯하고 무의미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명확함이며 일관성 없는 명확함입니다. 음악은 자신에게 안주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음악이 대범한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감정은 불타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성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음악은 얼핏 움직임 그 자체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음악에 정적주의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은가 의심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음악에 정치적인 반감을 품고 있으니까요.”

p.230 - 2024.10.19
“음악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궁극적인 수단으로서 더 이상의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신이 음악의 영향력을 모범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앞으로 위로 끌고 가는 음악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이 음악에 선행되어야 합니다. 음악만으로는 세상을 앞으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음악만으로는 위험합니다. 조선 기사인 당신에게는 음악이 절대로 위험합니다.

p.231 - 2024.10.19
당신은 음악의 본질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윤리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음악은 아주 독특하게 활기에 찬 분할법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눈뜨게 해 주고 정신을 부여하며 이를 귀중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음악은 시간을 일깨워 주고, 우리가 시간을 극히 섬세하게 향유하도록 일깨웁니다. 음악은 일깨워 줍니다. 그런 한에는 음악이 윤리적입니다. 예술은 일깨워 주는 한 윤리적입니다. 하지만 음악이 이와 반대되는 작용도 한다면 어떨까요? 음악이 의식을 몽롱하게 하고, 잠들게 하며, 행동과 진보를 방해한다고 하면 말입니다. 음악은 그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아편 같은 작용도 할 수 있습니다. 악마와 같은 작용 말입니다, 여러분! 아편이 악마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은 무감각, 타성, 무위와 노예적인 침체를 낳기 때문입니다. 음악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습니다, 여러분. 음악에 믿을 수 없는 구석이 있다는 내 견해를 철회할 뜻은 없습니다. 음악에 정치적으로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내 말이 그리 지나치지는 않을 겁니다.”

 

p.243 - 2024.10.19
사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프리비슬라프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교정에서 놀고 있는, 그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유독 그를 찍어서 그에게 관심을 갖고 시선으로 그를 쫓아다녔다. 어쩌면 그를 찬미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등하교 길에 학급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프리비슬라프를 관찰하고, 그가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고, 듣기 좋게 목이 잠기고 다소 쉰 듯한 그의 목소리를 멀리서 듣고 분간해 내는 것을 커다란 낙으로 삼았다. 그의 이교도적인 이름, 그가 모범생이라는 사실(하지만 이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또는 마지막으로 키르키스인 같은 눈-가끔 무심결에 곁눈질해서 볼 때 녹아 내리는 듯 어스름하게 밤과 같은 빛으로 흐려지는 눈-이런 것으로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히페에게 갖는 관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의 감정을 정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또는 부득이한 경우에 그런 감정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욱이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히페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우정이라 부르는 것도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로 그러한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한 감정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고, 이름을 붙여 주기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어떤 이름을 붙이는 일은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짓는 것을, 즉 익히 아는 익숙한 것에 집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러한 마음속의 재산을 그렇게 규정짓고 집어넣는 일로부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었다.

p.245 - 2024.10.19
그는 그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움직임을 사랑했고, 오늘도 그를 만날 것인가, 바로 자기 옆을 지나갈 것인가, 혹시 자기를 쳐다볼 것인가 하는 긴장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비밀이 선사해 주는 조용하고 미묘한 실현의 기쁨을 사랑했고, 그런 일에 따르게 마련인 실망까지도 사랑했다.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히페가 ‘결석’하는 날이었다. 그러면 교정은 황량해지고, 그날은 모든 매력을 잃었지만, 그래도 다음날에 대한 희망은 접지 않았다.

p.256 - 2024.10.19
모든 본능 중에서 사랑이야말로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스러운 본능이며,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치유할 길 없는 도착(倒錯)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p.462 - 2024.10.25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눈먼 장님이라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 자신도 이를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고, 기품 있고 고결하며, 단순한 성품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그리고 말하자면 그게 그의 장점이다-만하임 출신으로 쇼샤 부인에게 빠져 있는 머리숱이 적은 사나이의 몰래 엿보는 본성과 여실히 구별되었다. 여기서 기억을 되살려 거듭 말해 두지만, 그와 같은 상태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는 대체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려는 충동과 욕구, 고백하고 자백하고픈 충동, 맹목적인 자아도취, 세상을 자기 자신으로 채워 버리려는 욕구가 으레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이 경우에는 그 대상에 의미, 이성 및 희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만큼 우리처럼 냉정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아무튼 이들은 그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다. 

p.468 - 2024.10.25
기다린다는 것은 앞질러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간과 현재를 선물로서가 아니라 장애물로서만 느끼고,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이를 마음속에서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지루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그렇기도 하지만 또한 짧기도 하다. 긴 시간을 그 자체를 위해 살거나 이용하지 않고 기다림이 긴 시간을 집어삼킬 때 말이다. 오직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소화 기관이 이용 가치가 있는 음식물의 영양가를 소화하지 않고 대량으로 걸러 보내는 대식가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인간을 더 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다리기만 한 시간은 인간을 늙게 만들지 않는다. 물론 순전히 기다리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경우는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겠지만 말이다.

p.472 - 2024.10.25
“적응이 안 되는 것에 적응한다는 말이군요. 아주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p.474 - 2024.10.25

러시아인이 ‘네 시간’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서구인이 ‘한 시간’이라고 하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셨나요? 이 사람들이 시간을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이들의 땅덩어리가 엄청 넓다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시간도 많은 법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시간을 갖고 기다릴 수 있는 민족입니다.


p.478 - 2024.10.25
인간의 고통을 온갖 종류와 항목별로 면밀하고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당신은 이에 대해 종류, 항목 및 체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정리와 분류야말로 극복의 첫걸음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p.549 - 2024.10.26
그는 생명의 모습을 보았고, 아름다운 사지 구조며 살이 빚어 만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녀는 뒷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손을 내리고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팔의 안쪽에, 즉 팔꿈치 관절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에서 혈관이, 두 개의 대정맥이 푸르스름하게 튀어나온 것이 눈에 보였다. 이 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그를 향해, 그에게, 그의 위에 몸을 숙이자, 그녀에게서 유기체의 향내가 났고, 그녀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느껴졌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자, 쾌감과 전율로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그녀의 바깥쪽 팔 위에, 삼두근을 팽팽하게 당기고, 희열에 들떠 서늘한 느낌을 주는 오톨도톨한 피부에 두 손을 갖다 댔다. 

p.557 - 2024.10.26

내 사랑은 한시도

나에게서 떠나지 않네.

p.595 - 2024.11.03
또한 러시아어로 말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 동방의 말은 선한 인상을 주는 페르게 씨의 콧수염 밑에서, 선하게 튀어나와 있는 후두에서 빠르고도 애매하게, 아주 낯설고도 흐물흐물하게 튀어나왔다.


p.641 - 2024.11.03

“우리는 여기에 앉아 꿈결에서처럼 구경이나 하지. 이렇게 둘이 앉아 있다니 꿈만 같아.” 그러면서 그는 다시 프랑스어로 말했다. “아주 깊디깊은 꿈만 같아. 이런 꿈을 꾸려면 아주 깊은 잠에 빠져야 하기 때문이지. 사실대로 말하면 이건 익히 잘 아는 꿈이자 줄곧 보아 온 꿈이며 오랫동안 꾸어 온 영원한 꿈이지. 지금처럼 네 곁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영원이야.”

“시인이시네!” 그녀가 말했다. “소시민이고 인문주의자이며 시인이라…… 그러니 온전하고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인 독일인이시네!”

“우리가 과연 그렇게 온전하고 이상적인지 자못 염려돼.” 그가 대답했다. “어느 점으로 보든 말이야. 우리는 그저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일 뿐이야.”

“재미있는 말이네. 그런데 나 말인데…… 이런 꿈이라면 좀 더 쉽게, 더 일찍 꿀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 보려는 결심이 너무 늦었어.”

                                              

2024. 11. 3. 대망의 첫 모임 @꼬메아미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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