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미학 스터디에서 <괴물들: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의 발제를 맡게 되었다.
사실 내가 자원했다.
성인지감수성이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여성 뮤지션으로 30년을 살아오며 별의별 일들을 보고 듣고 겪어 왔기에, 이 책의 주제는 정말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문제들이었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먼저 책의 디자인에 반했고, 클레어 데더러의 글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마치 소설을 읽듯 막힘 없이 쑥쑥,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이 뛰어난 여성 작가의 재기 발랄한 문체에 몸을 던져, 그녀와 함께 질문하고, 함께 으웩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다 보면, 이 추잡한 괴물 예술가들에 대해 연민과 동질감, 인류애 따위까지 느끼게 되어버린다.
작품이란 작가의 손을 떠나 세상에 발표되는 순간부터 감상자(소비자, 대중)의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독자 개개인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작품은 주관적 해석을 얻게 되고, 그 작품은 그 감상자에게 개인적인 의미가 담기며 소중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 작품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감상자의 가슴속에 수없이 복제되고 변형되며 전설이 된다.
비록 '괴물' 같은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요즘 음악 분야 최고의 괴물이 된 디디(퍼프 대디)의 'I'll Be Missing You'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움직이고 영어 가사까지 (왜) 다 기억나서 끝까지 따라 부르게 된다. 자료 화면이라도 나오면 그 위선적 얼굴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인상이 찡그려지지만, 몸이 기억하여 그 곡을 반가워하는 것은 제어할 수 없다.
게다가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어디서나 그 노래가 흘러나오던 90년대 후반의 밤공기가 코 끝에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란...
괴물의 과거사가 까발려지며 우리의 추억과 사랑했던 작품들도 땅바닥에 떨어져 무참히 짓밟힌다.
가서 멱살을 잡고, 도대체 왜 그랬냐고 왜 다 망쳐버렸냐고, 이제 그 노래만 나오면 베이비오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싸대기를 날리며 따지고 싶다.
내가 그 노래나 그 가수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곡인데, 듣자니 괴롭고 안 듣자니 아쉬운, 이런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슬프고 어이없는 일이라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난 알 켈리 좋아했다 ㅠㅠ)
괴물들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것이기도 하고, 그 작품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 새끼 돌려내~ 라고 하고 싶지만, 한번 묻어버린 얼룩은 희미해질지언정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괴로움을 안겨주는 이 괴물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데?
괴물 예술가의 괴물 짓들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들의 작품 전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괴물 작가의 작품을 내 삶에서 삭제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안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쩔 도리가 없으면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길티 플레저'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문화적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괴물인 줄 모르고 좋아했는데 괴물이 된 예술가와 괴물인 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작품들을 대하며, 모호한 경계에서 윤리와 예술, 그리고 인간됨의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원함과 답답함이 동시에 남는,
여성 예술가라면 울면서 공감할 부분이 있는,
정답이 없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그래도 통쾌하게 파헤친,
멋진 책이다. 강추!!
[작가 소개]
클레어 데더러(Claire Dederer)는 미국의 작가이자 문예 비평가로, 주로 여성의 삶과 예술,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글을 써왔다. 그녀는 회고록과 비평을 넘나들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이슈를 탐구하는 글쓰기로 유명하다.
그녀의 첫 번째 주요 저서 『Poser: My Life in Twenty-Three Yoga Poses』(2011)는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이자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자전적 에세이로, 요가를 중심으로 여성의 자기 탐색과 모성, 결혼 등을 유머러스하고 진솔하게 다룬 작품이다.
2023년에 출간된 《괴물들(Monsters: A Fan’s Dilemma)》은 전 세계에 출간되는 《파리 리뷰》에 그동안 기고했던 에세이 〈괴물 같은 사람들의 예술품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Do We Do with the Art of Monstrous Men?〉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술가의 도덕성과 작품 감상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한 책으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 책에서 데더러는 로만 폴란스키, 파블로 피카소, 마이클 잭슨 등 논란이 많은 예술가들의 사례를 분석하며, “우리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계속 즐겨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밖에도 《뉴욕 타임스》, 《애틀랜틱》, 《네이션》, 《보그》 등 여러 간행물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 퍼시픽 대학교 예술학 석사 학위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국 워싱턴주 서부에 있는 퓨젓사운드Puget Sound에 있는 섬에 거주 중이다.
[프롤로그]
저자는 로만 폴란스키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의 악랄한 성범죄에 경악했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는 예술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한 ‘괴물 같은’ 남자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의 가치는 작품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창작자의 윤리성까지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p.24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버리지 못한다.
[1 호명. 우디 앨런]
소비자들은 수많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의 괴물 같은 면을 보고 돌아서지만, 그럼에도 계속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예술가의 작품을 분리하거나 분리하려는 노력을 한다.
우디 앨런의 사생활 때문에, 그는 창작자의 행위가 창작품의 소비를 방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저자는 그의 작품인 <맨해튼>을 보고 남성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권위를 앞세운 끊임없는 맨스플레인에 지쳐간다.
p.58
만약 허리케인 순이가 우디 앨런이라는 땅에 착륙하지 않았더라도 영화 <맨해튼>과 영화의 친-소녀 반-여성 관점에 자연스러운 거부감과 분노가 일어났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고 바로 여기에 논의의 핵심이 있다.
남자들은 우디 앨런이 왜 그렇게까지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든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맨해튼>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났다고 하면 남자들은 말한다. "그 감정 말고요. 그건 틀린 감정이에요." 그는 권위를 갖고 이야기한다. <맨해튼>은 천재적인 걸작이 맞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물의 이력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역사의 승리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 승자는 남성이다.
[2 얼룩. 마이클 잭슨]
저자가 말하는 ‘괴물’이란, 특정한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작품을 순수하게 감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들의 개인사와 비윤리적 행동은 작품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며, 소비자는 그 영향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특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티스트의 사생활을 모른 채 작품만을 감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p.65~66
'최근 MJ의 음악에 대해 미학적, 도덕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어.
...
하지만 얼룩에도 소급이 적용될까? 그런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 매력에 굴복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폴란스키 영화처럼 말이지.'
...
‘괴물'이라는 단어는 모든 분노를 담을 수 있는 여행 가방과도 같다. 그 말을 내뱉게 하는 분노도 있고 문제의 괴물의 친구나 적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분노도 있다. 그런데 얼룩은 괴물과 다르다. 얼룩은 그냥 슬프기만 하다. 지워지지 않아 더 슬프다.
아무도 얼룩이 생기길 원치 않지만 얼룩은 생긴다.
p.73
인터넷이란 우리와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개로 이루어지기에 괴물의 필연성은 전기의 연료를 받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인터넷이 주로 하는 일이다. '캔슬 컬처'라는 단어 자체가 전기에 특권을 주는 일을 전제로 하고,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개인사가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고,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하나의 얼룩은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온 이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취소(캔슬)당했거나 취소당할 예정이다.
얼룩은 퍼지고 흘러 어쩔 수 없이 짙은 와인 자국을 남긴다. 개인사 노출의 결과다. 범죄는 사람이 저지르지만 얼룩은 작품에 남는다. 그리고 그 작품을 다루는 건 관객인 우리 몫이 된다.
[3 팬. J. K 롤링]
우리는 지금 ‘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연예인과 팬의 관계처럼 한쪽은 상대를 인식하지만 상대는 이를 알지 못하는 ‘유사 사회 관계’ 속에서 열정적인 팬덤이 형성되며, 이는 거대한 시장을 이루고 있다.
창작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관계의 역동성은 더욱 강해지고, 창작자의 행동이 남긴 얼룩은 팬들에게 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21세기 초반 20년 동안 해리 포터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지배했다. 특히 LGBTQ+ 운동과 맞물려 이 작품은 아웃사이더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으며, 퀴어 아이들에게는 소속감과 유대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2021년 J. K. 롤링이 트랜스젠더를 차별하는 발언을 하면서 ‘포터 키즈’들에게 실망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p.76~77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러한 열성적인 팬덤은 전기보다 작품을 더 우선시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나를 정의하게 되고 집착을 하면서 아티스트의 전기는 이전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당신은 작품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이 된다. 따라서 작품의 창작자와는 더 새롭고 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러니까 팬들은 자신을 창작자와 동맹 관계로 인식한다. 따라서 전기는 그저 어디에나 편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중요해진다. 얼룩은 우리 인생에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그 얼룩을 어떤 식으로든 느낀다. 우리는 상처받는다.
[4 비평가]
저자는 작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점점 더 중요한 요소로 느껴졌고, 괴물 같은 남성 예술가들에 대한 문제를 논리적 사고가 아닌 감정의 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권위자의 의견에 의존하는 대신, 개인의 주관적인 반응을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비평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퀴어 밴드 ‘파워 보텀’의 한 멤버가 젊은 여성 팬을 성추행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다는 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술 소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p.104
향수나 개인적 경험은 작품의 위대함과 나쁜 행위의 정도를 비교하여 결과를 계산할 때 중요한 의미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그저 권위에 기대서 무언가를 훌륭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목격했듯이 권위 또한 이해관계나 경험에, 혹은 단순히 많은 이의 미학적 취향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우리 감정에 좌우된다.
계산기를 돌릴 때 사랑이라는 요소를 빠뜨리기는 너무 쉽다. 사랑은 (때로는 받아도 마땅한) 대중의 비난이라는 요란한 소리 옆에 서 있는 조용한 소리다. 비판적 사고는 작품에 대한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무언가가 우리를 감동시켰다면 우리가 누구이건 간에 우리는 그 무언가에 아주 작은 충성심이라도 보여 주어야 한다.
[5 천재.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무리 비윤리적인 행동을 저질러도, 일부 남성 예술가들은 ‘천재’라는 명목 아래 용인받으며 대중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저자는 특히 남성성을 과시했던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리고 수많은 록스타들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며 이 문제를 탐구한다.
p.137~138
"...
‘베니티 페어 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웨인라이트는 말했다. "결혼하고 어린아이가 둘 있었지만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여러 날을 술에 취해 북미와 영국 제도의 모든 웨이트리스와 자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했냐고? 이 모든 순간이 조각으로 남아 노래 안에 흩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대한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창의적이 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된 기분을 느끼는 것이 필요한가? 나는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니라면 말이다."
창의적이 되기 위해서 가끔은 쓰레기가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예술가는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관습뿐만 아니라 정신적 혹은 정서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할까?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는 예술가라는 개념은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 즉 바이런식의 영웅 이미지 안에서 마취되거나 매끄러워지거나 예쁘게 다듬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미지는 특정 사람에게만 열려 있고 그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다들 남자다.
[6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시간의 문제. 리하르트 바그너, 버지니아 울프, 윌라 캐더]
과거에는 불평등과 비인도적 행위, 특히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여성혐오가 만연했다.
저자는 파시즘을 옹호한 반유대주의자 리하르트 바그너와 버지니아 울프,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윌라 캐더를 사례로 들며, 과거의 예술가들이 가진 문제적 사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거의 괴물들이 창작한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캔슬 컬처는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p.170
개인적으로 나도 과거에 내가 했던 말과 내가 쓴 글, 내가 한 행동을 후회한다. 그것들은 아직도 저 바깥에 있고 나는 내가 틀렸음을 안다. 내 실수 때문에 언젠가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있다. 어쩌면 불시에 망신과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미투에 대한 이해로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일까? 마치 그리스 신화의 맞바꾸기처럼 하나를 내주지 않으면 하나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기 위해 잠재적인 지위 상실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내 대답은 실험적이지만 예스다. 지위 상실이 아무리 끔찍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맞바꾸기는 우울하고 어쩌면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지금 당장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거래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기 위해 합당하건 그렇지 않건 받을 만하건 그렇지 않건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는 대신 모욕적이고 점점 멍청해지는 이름인 캔슬 컬처를 만들어 냈다. 캔슬 컬처는 방정식의 절반을 무력화해 버렸는데 이 절반 안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이건 잘못된 거래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우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환상은 우리가 언제나 과거보다는 더 나아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귀를 막는다면 어떻게 발전한 수 있을까?
[7 안티 몬스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그 유명한 소설인 <롤리타>는 소아성애자인 주인공 험버트의 1인칭 서술로 진행되며 이로 인해 많은 독자들은 종종 험버트와 나보코프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통해 현실에서 너무나 쉽게 벌어지는 아동 성범죄의 위험성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로 오해받을 위험까지도 감수했다.
p.191
나보코프는 사실 일종의 안티 몬스터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최악의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기꺼이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악의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에 자신도 연루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의 방법으로 유년기를 도둑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일인지 이해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이 책은 괴물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보코프는 훨씬 더 기적적인 일을 해냈다. 그는 평범한 삶이 파괴되었다는 증거인 무지갯빛 깃털 하나를 찾아냈다.
[8 침묵시키는 자와 침묵당한 이. 칼 안드레, 아나 멘디에타]
1985년, 자신보다 더 유명했던 예술가인 남편 칼 안드레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페미니스트 예술가 아나 멘디에타는 유색인종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예술적 성과도 잊혔다.
그러나 그녀는 1992년 여성 인권 단체와 젊은 시위 참가자들의 노력으로 재조명되었다. 안드레의 설치 작품 앞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기발한 시위는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p.201
제도권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제도가 승인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의견과 존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통하지 많을 수도 있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고 신파적이며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위자들의 눈물은 거의 잊힐 뻔한 한 예술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남자는 여자를 침묵시키고 법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았고 기관은 여자를 잊었다. 이 눈물의 시위대를 보며 크레이프 가게에서 만난 소녀를 떠올렸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실망시킨 뮤지션을 여전히 사랑하기로 한 소녀였다. 시위자들도 크레이프 소녀처럼 자신만의 비판, 감정에 기반한 비평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허밍버드의 노래가 더 크게, 점점 더 크게 들리도록 했다.
[9 나는 괴물일까?]
저자는 육아와 살림을 책임지는 여성 예술가로서 창작을 위한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하고,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치 나쁜 엄마가 된 듯한 죄책감과 회한에 사로잡히며, 스스로도 ‘내가 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남성과 달리 여성의 야망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가정을 아내에게 떠넘겨도 괜찮은 남성 예술가들과, 육아와 살림을 책임지면서도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현실을 비교하며 그 불평등을 조명한다.
p.217~218
작업을 완성할 때 나오는 나의 괴물성은 언제나 외로움과 꼭 닮았다. 가족을 뒤로하고 통나무집이나 저렴한 모텔 방을 빌린다. 그렇게 멀리 가지 못한다면 외풍이 센 서재에 숨어 머플러를 목에 감고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털모자를 쓰고 죽어라 달릴 것이다. 그저 이 일을 끝까지 마치기 위해서.
야망과 작품 완성. 이 두 가지가 예술가를 만든다. 예술가는 작품을 시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끝내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야만적인 일을 저질러야 한다.
내 친구와 나는 일을 끝까지 마감하기 위해 누군가 아이를 봐주길 기대한 것보다 더 괴물스러운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 이는 강간만큼 악랄한 범죄도 아니고 누군가를 옆에 세워 두고 화분에 자위를 하는 것만큼 변태적이지도 않다.
내가 이 두 가지 즉, 남성 포식자들과 작업을 마친 여성 예술가를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비교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여성이 글을 쓰거나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 괴물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냉큼 그렇게 우리를 묘사한다.
[10 자녀를 유기한 엄마들. 도리스 레싱, 조니 미첼]
괴물이라 칭할만한 여성 예술가들이 행하는 최악의 일은 아이를 저버리는 것이다.
도리스 레싱은 두 자녀를 남겨 두고 막내만 데리고 집을 떠난 후 런던에 정착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여성 문학가가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자신의 예술을 위해 아이를 떠난 뮤리얼 스파크, 앤 섹스턴, 조니 미첼의 사례를 떠올리며 저자는 래넌 재단의 후원으로 가족을 떠나 텍사스주 마파에 혼자 머물며 작업에 몰두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만큼이나 자신의 예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이 가능한지, 엄마 정체성과 예술가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한다.
p.255~256
이 새로운 정체성,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유기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멀리 돌아왔지만 다시 마사 겔혼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자기가 구역질 나는 인간이라는 점을 만회하기 위해 위대한 천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덮기 위해서 위대해져야 한다. 이건 여성에게도 진실이다.
(미첼도 아이를 포기했지만 위대한 노래를 탄생시킴으로써 일종의 균형을 맞추었다. 반드시 성공적인 균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날아간 도리스 레싱은 마치 '예술가가 되기 위해 아이를 포기한 여인'이라는 동화 속 주인공 같다. 우리에게는 동화, 우화, 신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화나 신화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도덕적 복합성을 좀 더 단순하고 광범위하고 뚜렷한 붓놀림으로 색칠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명확한 의도를 갖고 이뤄지지 않는다. 정말로 레싱은 자신이 잃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어려운 천재가 되어야만 했을까? 조니 미첼이 그랬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천재성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선물, 어딘가 신비로운 곳에서 흘러나온 힘에 가깝다.
[11 여자 라자러스. 밸러리 솔라나스, 실비아 플라스]
친족 성폭력 피해자였던 밸러리 솔라나스는 <스컴 선언문>에서 이 지구상의 남성들을 멸종시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당시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분노 속에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정신병동을 드나들며 마약에 중독된 채 성 노동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스트레스에 추위, 독감과 생계 문제까지 겹쳐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어 자살했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작품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이 여성 예술가들의 폭력적인 행동과 페미니즘, 괴물 남자 예술가들의 괴물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p.275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이 두 여자의 이야기를 각각 동화로 만들었다. 플라스는 희생자이고(오븐) 솔라나스는 가해자(총)다. 나는 조니 미첼과 도리스 레싱을 여성 이기주의에 대한 교훈적 우화로 썼다. 여성 예술가는 죽음의 골짜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작품으로 가는 길을 걷는, 일종의 <천로역정 Pilgrim Progress>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만약 조니와 레싱이 여성 역량 강화의 우화가 된다면 플라스와 솔라나스는 무력감과 분노의 우화가 된다.
[12 술꾼들.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카버는 유명한 작가가 거의 없는 미국 북서부 출신의 성공한 소설가로, 알코올중독자였다.
저자도 사실 10년 넘게 매일같이 술을 마신 알코올 중독자로, 카버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점과 술주정뱅이였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며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을 끊게 되면서 ‘괴물’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의 내면에 있는 '괴물성'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은 소비자 개인의 선택이고,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에서 예술가의 윤리적 행동을 고려하는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p.292~293
이 모든 깨어남 속에서 "우리는 이 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책임을 갖는 방식이 그 작품과 창작자를 소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돈과 관심을 끊는 것이 진보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그러나 그게 정말 변화를 가져오는가?
다른 사람이 부적절하게 소비한다는 말은 적절한 소비가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이 괴물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정된 소비자의 역할로 밀어 넣는다.
문제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언제나 윤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련의 결정이 내려진 다음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이 올바르고 윤리적인 행동인지 스스로 해석해야만 한다. 마이클 잭슨의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질 때도 여전히 마이클 잭슨은 이용당하고 포장되고 공급되고 충족되고 구미에 맞춰지고 있었다. 음악 산업은 음악 종사자와 관련된 윤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일은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카페에서 'I Want You Back'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감정과 반응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13 사랑받는 이들. 마일스 데이비스]
평론가 데이브 히키는 한 인터뷰에서 ”미美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며, 좋아해야 하는지 안 하는지에 상관없이 저절로 마음과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치 얼룩에 대한 비자발적 반응과 흡사하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지만 여성을 학대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의 음악을 계속 들어야 할지 난감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예술의 효과는 각자 다르게 느끼는데, 이는 미적 경험이 모두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며 주관적인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하고, 작품과의 우리의 관계도 변한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괴물 예술가와 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312~313
"하지만 중요한 건 말야." 샘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아직도 프레드를 사랑해. 그래서 네 책 생각이 난 것 같아. 그가 한 짓들이 있는데도 말이야."(이 표현이 또 나왔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아저씨가 죽기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아서 다시 친하게 지냈어.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은 날 사랑했고 나도 아저씨를 사랑했어. 아직도 사랑해.'
샘의 생각 앞에서 내 몸은 꼼짝 못 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내내 말하려던 거였다. 나도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거대한 돌기둥 근처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한낱 모기에 불과하다. 더 큰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괴물 같은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는 끔찍한 사람들을 사랑해 왔다. 내가 어떻게 알까? 왜냐하면 나는 사람을 알고, 그들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샘은 모든 것의 핵심에 있는 진짜 문제로 들어갔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문제다. 카라바조부터 마이클 잭슨까지 남자들이 우리에게 던져둔 미학적, 윤리적 문제는 이 더 큰 문제를 말하기 위한 비유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끔찍한 사람들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 삶에서 삭제해 버릴까? 신속하고 확실하게 정의를 실천할까? 캔슬해 버릴까? 가끔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내가 초반에 소개한 그 계산기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묻거나 묻지 않지만 이 문제를 통과하며 나의 길이 무엇인지를 느낀다. 그들의 끔찍함은 어느 만큼의 끔찍함인가?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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