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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첫 번째 미학 스터디, <미학에 고하는 작별>
내가 얼마나 무식쟁이인지 한없이 겸손해지며 작아지는 시간.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감도 안 잡혔는데 '옮긴이의 해제'와 스터디 내내 상세히 해설해 주신 발제자님 덕분에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셰퍼는 미를 단순히 예술작품의 특성이 아닌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아야 하며, 예술보다는 '미적 경험'과 '미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미적 경험을 일상에서 발견되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정의하며, 이는 단순한 감각적 자극을 넘어서는 인지적 주의력과 관련된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미적 경험은 개인의 내적 느낌과 외적 자극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미적 경험은 철학적 지식이나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개인이 세계와 맺는 주관적 관계에서 시작된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순수하게 개인적 경험으로 받아들이거나,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두 접근 방식 모두 완전한 미적 경험이 될 수 있으며, 결국 우리는 '짧디 짧은 삶' 속에서 "나는 진심으로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미적 경험을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무얼 좋아할 것인가?
[옮긴이의 해제] P.153~159
<미학에 고하는 작별>이 주는 미와 예술에 대한 시사점들
미를 다루는 모든 논의에서 셰퍼는 일관적으로 본인 스스로의 미적 경험을 회상하고 답습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주지하듯 그는 경험 내 미적 사실 분석을 새로운 미학의 최우선 과제로 상정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한 폭의 그림이나 풍경을 바라보고, 음악을 듣거나 소리의 풍취에 빠져들거나, 시를 읊거나 영화를 볼 때, 그 사람이 미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어떤 활동도 아닌 자신이 하고 있는 그 활동에 전념한다는 단순한 전제하에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서 논의되는 경험의 종류는 많은 점에서 평범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특별하고 함축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류 문화에서 이 경험은 공동 경험에서 분리되는 특정한 종류의 경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들은 무엇인가?
먼저, 일상적 경험에서 또는 그것으로부터 "특별하고 함축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면 이는 우리가 대상을 불문하고 모든 상황에서 미적 경험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감정과 향락적 예측을 근거로 하는 자기만족의 방향에 맞추어 인지적 주의력을 활용하는 일종의 '모드'가 작동될 때, 우리의 공감각적 감관(모든 감각 기관을 통해 자극들을 받아들이고 그 자극들을 감성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각적 경험이 아닌 모종의 주의력을 요구하는 경험을 위해 쓰이게 된다. 셰퍼의 미학은 모든 개인이 경험할 수 있고 실제로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적 사실들에 감관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우리를 미적 경험으로 이행하게 하는 실천의 실마리는 주의력이다. 여기서 주의력은 나의 내적 감각에 대 한 주의력과 외적 인지 활동에 대한 주의력 모두를 포함한다. 미적 경험 내에서 나는 나의 내적 느낌들에도 주의력을 기울이지만 최적 인지 활동이 주는 자극들을 그 내적 느낌들과 상충하게도 한다. 셰퍼가 과학적 연구 자료들을 참고하여 내리는 중추적 결론 중 하나는 주의력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 나에게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어떤 대상(자연물 또는 예술 작품)을 미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첫 번째 열쇠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지식적으로 미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는 다른 사람이 나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나의 '지금 여기', 내가 주의력을 발산하여 구성하고 있는 경험의 발생을 막거나 저해할 수는 없다. 즉, 미적 경험은 일차적으로 세계와 내가 맺는 주관적 관계에서 시작된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일반 독자가 미학 저서들을 탐독할 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기존의 수많은 철학적 분석과 지식이 자신의 삶,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미적 경험과 무슨 상관관계를 지니는가를 결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학 저서들이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경험한 내적, 외적 사실들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으며 이것이 나의 어떤 경향을 드러내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혹자에게 있어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지 않다면 미적 경험은 분석될 필요도, 토론될 필요도 없다. 그저 홀로 향유하면서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더라도 이 경험의 존재 이유, 강도, 지위, 정당성을 저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셰퍼는 우리 스스로의 주의력 활용에 대한 사실적 분석(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철학 없이도 가능하다)이 삶으로의 '적극적' 참여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짧디 짧은 삶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요구한다."
이러한 실마리는 이미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 질문들로써 선취되고 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심취하여 들은 음악에서 나는 어면 연유로, 어떤 회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몸소 느끼려고 하였는가?
내가 나와 특별한 관련점을 갖지 않는 것 같은 삶 속의 아주 하찮은 디테일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눈이 돌아가며 왜 눈에 밟히는 것이 계속 생기는가?
내 옷장의 옷들, 내가 스마트폰에 캡처해 놓은 이미지들,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사물들은 나의 가장 주관적인 삶에 대해 무얼 말해 주는가?
지난번에 본 그 영화는 왜 자꾸 생각나는가?
나는 저 사람에게 왜 끌릴까?
내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려면 나는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며 어떤 지적 활동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의 일상 내의 미적 사실들을 경험적으로 반영하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질문들이다. 셰퍼가 미에 대한 모든 성찰은 경험된 사실들에 대한 성찰이어야 한다고 강조할 때, 거기서 암시되고 있는 사실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미를 성찰한 모든 학자도 같은 심신의 능력과 조건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즉, 미를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미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미적 경험을 필히 우선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이러한 미적 경험의 내향적 성격은 신경생물학적 조건들에 의해 수행되며, 미적 사실의 발생은 이 조건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셰퍼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미적 사실의 발생뿐만 아니라 예술(의도적 작품 제작의 실천)도 신경생물학적 조건들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술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기 전에 먼저 작가의 미적 행동들과 미적 사실들의 결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미적 사실들의 분석이 예술 작가가 어떤 내적, 외적 사실들을 거쳐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는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셰퍼가 대부분의 현대 분석미학 저자들을 따라 주장하는 바는, 예술에는 어떠한 신비하고 마술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된다면 그러한 주장은 누군가의 미적 근거에 의거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경험할 때 그것을 어떤 초월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판정하기 전에 그것의 여러 특징과 그것에 얽힌 사실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인지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의도에 접근해야 한다. 나아가, 예술 작품이 "예술을 위한 예술" 또는 순수한 예술이라는 이상 실현을 위한 주조물이라 주장된다면, 그러한 주장 '역시' 우리의 신경생물학적 조건들'로써' 가능해지는 미적 이상에 대한 서술이 다. 거기서 "예술"이라는 단어는 그 작품을 있게 한 작가의 의도와 일련의 사실들과는 한 단계 멀어져 있는 가치 판단과 찬미를 위한 용어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은 미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만든 우리와 같은 신경생물학적 조건들 아래 살아가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구현된 것이다
우리(예술 관객)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공연장, 길거리 퍼포먼스 등 모든 예술의 장을 방문할 때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술 작품을 내가 경험하고 싶은 대로 경험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예술 작품을 체험함으로써 예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도를 독해하려는 태도이다. 두 태도는 섞일 수도, 섞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양자 모두 각각 그 나름대로 한 개인에게 완결된, 그에게만 적실한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전한 미적 경험이 될 수 있다. 세퍼에 기대어 말하면, 이 중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오로지 우리가 우리의 주의력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활용하는가, 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활용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예술 작품들에 대한 관객의 경험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일반 관객은 대부분 저 두 태도 사이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사태의 분석에서 멀어진 인지 방식과 사유 방식에게 "작별"을 고한다면, 우리는 저 두 태도 사이를 더욱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누빌 수 있고, 그럼으로써 예술 작품들을 더욱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인지 대상이 우리에게 미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대상이 인지적 주의력을 활용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미적으로 경험되지 않던 것을 미적으로 경험할 이유를 오로지 나 자신의 삶에서만 찾고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주의력을 미적이지 않은 대상에 활용할 때 최소한의 대가, 즉 "스트레스"를 치러야 한다. 쉽게 말해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짧디 짧은 삶" 속에서 "마땅히 치러야 하는" 이 대가, 소비가 나의 실제 삶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선택은 어려울 수도 있고 손쉬울 수도 있으나 분명 필요한 선택이다. 그 선택을 부르는 질문은 나는 진심으로 무얼 좋아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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