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시필사. 172일 차]
분다 - 정다인
당신의 뒷모습은 바람의 탁본이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역류의 시발점, 바람이 분다 신탁도 없이 웃자란 생의 비의를 끌어안고 당신이 쓸쓸하게 웃을 때 후우, 바람이 분다
미처 여미지 못한 옷깃에서, 헝클어져 엉킨 머릿결에서 숨결보다 얕은 바람이 인다 당신이라는 말, 불러 세울 수 없는 먼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순간들이 모여 세상은 더 낯선 곳으로 흘러간다 당신과 나의 서먹한 저녁이 수저 소리도 없이 어두워지면 길 위에선 또 다른 당신이 바지춤을 추스른다 스쳐 가는 뒷모습은 겹쳐지고 또 겹쳐져 문풍지처럼 떨리고, 당신은 그을음처럼 가라앉는다
한때 불꽃을 가졌으므로 당신과 나는 생살을 주고받은 사이, 널름거리던 화염 속에서 우리의 뒷모습은 뜨거웠을까 바람이 생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불쏘시개로 사라져버린, 피가 당기는 당신을 찾아 나는 바람을 거스른다
바람이 분다 당신에게서 내게로 내게서 당신에게로
헹궈낼 수 없는 얼굴을 들고 먼 곳을 향하는 당신은 회색의 얼굴로 날리듯 사라진다
손을 뻗으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저녁의 검은 등판 위에 찍히는 바람의 몸, 바람의 말, 바람의 텅 빈 동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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