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남다른 도전이 두렵지 않기 위하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크게 꺾여본 사람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실패는 무척 아프다. 아득바득 온 힘을 다해 노력했을 경우는 더 하다. 간단없이 쏟은 열정, 영혼을 불태우던 숱한 시간들이 하릴없이 스러져버렸다. 그렇게 치열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면 이제 어찌할까 하는 절망감이 밀려든다.
남다른 길을 걷고 있다면 헛헛함이 훨씬 클 테다. 밥그릇 챙기지 못할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이해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나이 먹을수록 남들같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가 된다.
예술이나 인문학, 순수 과학 같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기란 참 어렵다. 부귀영화를 누릴 가능성은 더더욱 적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 때로는 내려놓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도대체 나는 어찌해야 할까?
열정을 다할수록, 영혼을 불태우며 노력했을수록 실패에서 얻는 쓰라림은 크다. 실패를 경험하고 막막한 상황에서는 도대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출처: Gettyimages>
0.1%만 이겨도 승리하는 싸움
이런 고민을 앓고 있다면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 1973~)의 응원을 들어볼 일이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처음에 700부만 인쇄되었다. 그나마도 350부는 팔리지 않아 불태워 버렸단다. 실망한 쇼펜하우어는 내용을 많이 고쳐 새롭게 책을 내었다. 그래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였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에게 큰 감동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라는 글을 쓰기까지 했다.
1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저조한 판매율을 기록했다. 2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한 니체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제 4부는 고작 40부만 찍었다. 출판하자는 곳이 없어서 니체 스스로 자기 주머니를 털어 인쇄비를 대었단다. 이 가운데 니체가 아는 사람 몇몇에게 나눠준 7권만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면 이 책들은 패배한 것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결연하게 고개를 젓는다. 고대 그리스 문학 가운데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오는 것은 천 권 가운데 한 권 남짓 정도다. 고작 0.1%만 살아남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일상적인 작업들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 창조적인 일들은 그렇지 않다. 죽어라 애써도 성과는 묻히기 십상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내 노력의 의미를 평가해보라.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읽은 니체처럼, 인류 역사를 바꿀 만한 누군가가 나에게서 큰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창조적인 일이란 0.1%만 이겨도 승리하는 싸움이다. 99.9%가 몰라주어도 상관없다. 0.1%만 내 작업의 가치를 알아주어도 세상은 혁명적으로 바뀔 테다. 특히 남들이 가지 않는 길, 평범하지 않은 도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가짐을 품어야 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 ~ 1940)의 위로를 전해준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2012, p.271.
나의 치열한 노력은 세상을 바꾸고픈 누구에게 ‘친구의 발소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시도는 과연 그럴 만한 수준에 올랐는가? 이 물음에 확신을 갖게 된다면 주변의 싸늘한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위대한 생각은 과묵함에서 온다
물론, 현실은 그래도 퍽퍽하다. 반복되는 도전과 거듭되는 실패, 내 일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상황은 외롭고 헛헛하다. 니체는 이런 처지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일류(一流)는 아니다 1).”
창의적인 도전이란 세상에 없던 것을 하는 일이다. 당연히 이해받기 어렵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재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할리우드 영화를 예로 든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지구의 명운(命運)을 걸고 싸운다. 왜 그럴까? 세상이 멸망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 설정이 아니면 관객들이 재미를 못 느끼는 탓이다. 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불감증’에 걸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상은 자극과 위협에 길들여져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창조적인 생각이 여물기 어렵다.
진정 의미 있는 성과는 꾸준하고 은근한 노력 속에서 피어난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1889 ~1951)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고 꼬집었다. 세상의 흐름에 조급해하며 목소리를 내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위대한 생각은 깊은 침묵 속에서 피어난다. 꾸준하고 묵묵하게 창조적인 작업을 계속해갈 일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많은 것이 가능하다
이 모든 충고에도 눈앞의 실패를 견디기 어렵다면? 그럴 때는 여느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상은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같이 비슷한 일이 꾸준하게 거듭된다. 물론, 이러한 일들에도 나름의 보람과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그대는 창조적인 도전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2)”이 부글거리는 까닭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니체의 말을 다시 전해준다.
“그대들이 비록 큰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중략)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3).”
평범한 사람은 주변의 평가로 자신의 가치를 가늠한다. 그러나 창조적인 영혼은 주위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자기 노력이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을 뿐이다. 위대한 영혼을 갖고 있다면 위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창조적인 영혼은 주위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위대한 영혼을 가진 그대라면 위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Gettyimages>
주석
- 1
- 같은 책, p.40
- 2
- 같은 책, p.276
- 3
- 같은 책, 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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